게트루드(Gertrud,1964) 칼 드레이어 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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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트루드(Gertrud,1964) 칼 드레이어 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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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쇠님이 번역 신청하면서 영상과 영자막을  

같이 보내주신 걸 이용했습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지만 칼 드레이어의 팬이라서

선뜻 번역에 응했습니다.


IMDB의 어느 리뷰어가 썼듯이

이 영화는 한 번 보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수정을 거듭하면서 받았습니다.


원작이 희곡이라서 그런지

매우매우 연극적인 연출이고

롱테이크와 대화가 거의 전부인 

사실 특이하달 수 있는,

나쁘게 말하면 '졸릴 수 있는' 영화인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죽여주는 바람에^^

졸릴 틈은 없습니다.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고

남자에겐 일이 우선이다,

라는 명제는 동서고금을 통해 진리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진화론적으로, 과학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재미는 없지만 명쾌할 순 있습니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존재이므로

남성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래서 남성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거듭 확인해야 하는

슬픈 운명체이지요.

'사랑한다'고 하면 일단 곁에 있어 줄 확률이 높고,

그러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을 확률도 높아지니까요.


남자는 여자와 자식에게 '묶인' 상태로

그들을 부양해야 하므로

'일'에 우선을 두게 되겠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 게트루드가 진화론을 조금 알았다면

그토록 '절대적인 사랑'에 집착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녀를 둘러싼 여러 남자들에게

사랑이란 육체의 쾌락과 같은 거거나

트로피처럼 자랑하는 대상이거나

암튼 그렇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인류가 지금껏 풀지 못하는 숙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직접 보시면서 해답을 구해 보시지요.:)


SCENE마다 싱크가 안맞아서 맞추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만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참다 못해 어느 분이 나서서

수정해 주셔도 좋습니다.


원제:Gertrud(1964/흑백)

연출:Carl Theodor Dreyer

덴마크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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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9 불량아이
수고하셨습니다.
GIVE 100 MP M 再會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1 앵두봉봉
감사합니다
22 시간의항해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19. 12. 28. 감상

단평 : 닫힌 문 뒤에 영화의 불꽃이 남아있다.

갇힌 것이 아니라 갇혀지는 것이라면, 정확히 그것이 그의
선택이고 그 선택을 옹호하는 불꽃이 거기 남아있다면 흔한 말로
'끝날 때까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엔딩에서 친구를 문 밖으로 배웅할 때 친구와 인물의 거리는
의도적으로 깊게 배정되고, 문이 굳게 닫히는 것을 영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본편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더 부가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플래쉬백의 빛인데, 회상들은 그것의 사연과 재질과
상관없이 과도한 빛을 허용함으로서 그것이 그 자체로 존재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전작 4편에 거의 허가되지 않았던 플래쉬백은
예술을 동반한 사랑의 순간과 예술로 인해 분리될 이별의 결정을
모두 담아낸다는 점은 속류적으로 자기반영성을 이끌어낸다.

두번째는 현상 혹은 실존적인 신의 부재이다. 전작들에서 신이
어떻게든 호출되었음을 감안한다면 본편에서 기표적으로라도 그것이
언급되지 않는 것에 먹먹해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사랑이 있다.
하지만, 서사적으로 이 사랑이 기적이나 참극을 이끌지 않는다.
오직 그 자리에 머무는 선택으로 인한 닫힘이 있고 그 닫힘에는
온전히 스스로가 될 수 있는 인물이 배정될 뿐이다.

이것이 전작에서는 거의 제시된 바 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본편이 굳이 에필로그를 추가하거나 플래쉬백을 사용하면서까지
변론하려고 했던 유작으로서의 자기 선언이라면 비판의 잔인함은
쉽게 생성될 수 없고 노인의 마지막 시간을 공경하게 된다.
정확히 인물의 실내에 타오르던 불꽃이 거울 속에 갇혀있던 인물의
상상계를 소각시키고 능히 실재의 시간 속에 착지했음에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