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닝 타이틀의 노을 아래 수평선에서 인물은 항해중인 전투함들을 관찰한다고 지정된다.
하지만, 관객은 그와는 달리 함선들보다는 노을과 수평선을 발견한다. 이후 인물은 이동을
스스로에게는 물론 집단에게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그가 본 것은 전투함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존 포드 세계 속 행진, 역마차 등의 기호들이 증발된 본편에서 그것은 마치 일종의
염원처럼 귀환한다. 나아가야할 것이 정지된 지금의 상황에 대한 운동, 그것이 본편이다.
본편의 헨리 폰다가 <분노의 포도>를 비롯한 일련의 존 포드 속 인물로부터 승계된다면
관객이 상기할 것은 <도망자>보다는 <젊은 날의 링컨>일 것이다. 여기에는 해당 작품의
기억될 엔딩 속 폭풍우와 홀로된 길 그리고 화석화된 역사의 찬란한 모순의 비극이 있다.
질문이 애석하게도 왜 인물은 전장에 나가고자하는가로 정리될 경우 이 비극은 배가되지만,
전장에 나가는 경로에서 왜 자유가 우선되어야하는가로 선회하면 잠시 희극이 도래한다.
물건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총책을 맡은 인물에게 물건이란 곧 개인의 자유이며 그것은
직업적 윤리이자 공동체적 선으로 귀결되는 불가능한 행복감으로 결과된다. 게다가, 이는
비누방울로 몸을 덮었던 후인에게 유전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더욱 희귀한 가치가 있다.
물론, 평화-야자수를 '던지는' 행위를 해야만 오히려 전쟁이 가능하다는 분열에서 존 포드의
현대적 인물을 반복 발견하는 것도 유의미하다. 1일 자유를 얻은 병사들의 정착지에서의
광란적 주취 소동에서도 동일한 태도가 내포된다. 하지만, 가장 큰 비극은 공동체와 개인의
상호 교화된 선의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저 밖은 여전히 죽음의 삭제가 지속된다는 점이다.
외부로부터 오지 않은, 내부에서 외부로 가려는 자의 미래에는 아련한 지평선이 없다.
단평 : 수평선의 노을은 '망원경'으로 보인다.
오프닝 타이틀의 노을 아래 수평선에서 인물은 항해중인 전투함들을 관찰한다고 지정된다.
하지만, 관객은 그와는 달리 함선들보다는 노을과 수평선을 발견한다. 이후 인물은 이동을
스스로에게는 물론 집단에게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그가 본 것은 전투함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존 포드 세계 속 행진, 역마차 등의 기호들이 증발된 본편에서 그것은 마치 일종의
염원처럼 귀환한다. 나아가야할 것이 정지된 지금의 상황에 대한 운동, 그것이 본편이다.
본편의 헨리 폰다가 <분노의 포도>를 비롯한 일련의 존 포드 속 인물로부터 승계된다면
관객이 상기할 것은 <도망자>보다는 <젊은 날의 링컨>일 것이다. 여기에는 해당 작품의
기억될 엔딩 속 폭풍우와 홀로된 길 그리고 화석화된 역사의 찬란한 모순의 비극이 있다.
질문이 애석하게도 왜 인물은 전장에 나가고자하는가로 정리될 경우 이 비극은 배가되지만,
전장에 나가는 경로에서 왜 자유가 우선되어야하는가로 선회하면 잠시 희극이 도래한다.
물건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총책을 맡은 인물에게 물건이란 곧 개인의 자유이며 그것은
직업적 윤리이자 공동체적 선으로 귀결되는 불가능한 행복감으로 결과된다. 게다가, 이는
비누방울로 몸을 덮었던 후인에게 유전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더욱 희귀한 가치가 있다.
물론, 평화-야자수를 '던지는' 행위를 해야만 오히려 전쟁이 가능하다는 분열에서 존 포드의
현대적 인물을 반복 발견하는 것도 유의미하다. 1일 자유를 얻은 병사들의 정착지에서의
광란적 주취 소동에서도 동일한 태도가 내포된다. 하지만, 가장 큰 비극은 공동체와 개인의
상호 교화된 선의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저 밖은 여전히 죽음의 삭제가 지속된다는 점이다.
외부로부터 오지 않은, 내부에서 외부로 가려는 자의 미래에는 아련한 지평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