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쇼다유 山椒太夫, Sansho The Bailiff, 1954

자막자료실

산쇼다유 山椒太夫, Sansho The Bailiff, 1954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1126263

네, 산쇼다유 자막입니다.

 

미조구치의 영화는 시선처리가 예술입니다.

 

이것도 기존에 있던 자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제가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점점 속도가 붙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역시 시간이 있어야 번역도 하겠군요.

없는 시간 쪼개서 제작하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이번에는 2개로 만들었는데 하나는 정석이고 하나는 드립입니다.

입맛대로 가져갔으면 좋겠군요.

 

-추신

 

영상하고 영자막은 있는데 

제대로 된 한글자막이 없는 것이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전 일본영화에 한해서 추천을 받고 싶습니다.

 

근데 안 할 수도 있습니다.

 

 

Comments

6 범쇠
하..미쳤네요. 보고싶던 영화 부초,산쇼다유가 이렇게 줄줄이..
노고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추카추카 32 Lucky Point!

14 cowboy
감사합니다.^^
1 구두
안녕하세요. 두 버전의 자막 앞부분을 비교해 봤는데 같아 보였습니다. 혹시 드립버전의 다른 점이 뭔지 알수 있을까요?
10 cxcxcc
끝까지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S 컷과송
2021. 8. 9. 재감상

단 평 : 아래로 간다

그 트랙킹을 어디까지 신뢰해야할지 주저할 때 작용하는 것이 관객인지 혹은 감독인지, 그 둘의 복합물인지 결정할 수 없다.
단순히 모호함 그 자체로 신화화되는 해석의 정지를 폐기하고, 이분법의 승리의 쾌감로 복속시키려는 관습도 무시하지 못한다.
주요 인물 중 누구도 포함되지 않는 시퀀스, 즉 거기에는 오직 카메라라는 감독의 시선만이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존속되는
광경은 서사 밖의 속내가 된다. 본편에서 산쇼다유가 추방되고 해방된 노예들만이 공간 안에서 음주가무의 난장을 행할 때
이들을 포착하는 카메라가 수평적임에도 이를 축제로 호명하기가 머뭇거려진다. 희비극이 아니라 환타지의 무책임일까?

부감 숏으로 두번 연속되는 - 그 사이에는 시간의 축적이 상황의 차이를 생성하는 - 나무가지를 부러뜨리는 시퀀스 역시
간단히 동의할 수 없다. 그 나무가지들은 정작 그다지 실용화되지 못했거니와 그저 남매 간의 협업 기표로서 작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동일시를 이끌어내는 장치에 불과하다. 이 내려다보기의 시선을 동정이든 혹은 응원이든 지지하기 전에
더 이상 도구도, 엉덩방아도 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한 이들에게도 여전히 부감을 감행했다는 선택을 완전히 믿지 못하겠다.
이것은 유려함의 차이와 반복이 아니라, 미덥지 못한 이들에게 보이는 외부자의 관찰처럼 들린다. 그 협업이 아름다운가?

<종이학 오센>, <마지막 국화 이야기>가 상기되는 희생 서사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의 유지가 본편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관념화될 때, 그 반대편에서 눈과 다리를 잃거나 수면 아래로 잠기는 가족 내 여성 역할의 반복은 감독 세계 내에서 모순적이다.
이념과 실행으로서의 존속이라는 남성과 조력과 수난으로서의 부재라는 여성, 이분법은 사회적 해방 서사를 불신하게 한다.
절대적 남근 아래에서 갑자기 뛰쳐나와 애원하는 위치가 곧바로 부의 유물에 의해 인증되는 과정 어디에도 여성의 역할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거기에는 오직 남성들간의 명예만이 일렁거리며 여성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