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자막의 예 - 1

자막제작자포럼

나쁜 자막의 예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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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말했던 아마추어 자막러가 <낭인가 1990>이라는 영화를 번역해서 또 보내 왔습니다. 근데 번역하기 전에 영어자막이 존재하는 거라서 그 스파팅에 맞춰 번역하려는데 괜찮겠느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안 괜찮죠. 
왜? 영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다르기 때문에 영어에 맞춰 스파팅한 게 한국어 번역에 맞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TC 찍는 작업이 얼마나 고된 작업인지 알고 있기에, 그리고 아마추어에게 프로의 기준을 강요할 순 없으므로 그냥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근데 받아 보니 역시! 당연히! 스파팅은 못 쓰겠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왜 영어자막 스파팅으로 하면 안 되느냐에 대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서 말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3년 전쯤, 영화관에서 헐리우드 영화를 봤는데 하나의 영화 안에서 프로 영상번역가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스파팅을 한 자막이 한두 개도 아니고 군데군데 눈에 띄는 거였어요. 근데 그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그와 똑같은 스파팅이 아주 많이 눈에 띄길래 '두줄의 승부사'라는 영상번역작가들이 모이는 카페에 있는 영어 번역작가 님들한테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이런 이상한 스파팅을 하느냐고 말이죠. 번역자 개인을 공격하기 위한 게 아니니 제가 자막 내용을 지어내서 질문을 던졌어요. 아무튼 그게 어떤 식의 자막이었냐 하면...

이제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날이 밝는대로

짐을 챙겨서 출발하자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가 가시나요?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 다시 한 번 더!

하나의 어구, 하나의 어절, 하나의 문장은 2개의 자막으로 나눠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하나의 자막으로 표현하라!!!!

왜? 그래야 관객이나 시청자의 가독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바꿔 말해 그래 주면 자막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관객이 극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그렇다면 위의 자막의 스파팅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이유가 없어'에서 끊어 줘야겠죠? 즉...

이제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날이 밝는 대로
짐을 챙겨서 출발하자

이렇게 처리해 주는 더 낫겠죠?
그런데 문제는 어디서 발생하느냐 하면, 영화제 자막의 경우는 영어 자막과 같이 한글 자막을 띄워 줘야 하기 때문에 영어 자막의 스파팅에 맞춰서 번역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한국의 번역자는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죠. 영어 어순에 맞게 잘려진 자막을 번역을 하되, 번역된 한글과 자막이 매끄럽고 자연스러워야 하니까요. 

근데 승부사 카페에 질문을 한 이유는 영화제 자막도 아니고 극장 개봉작인데 왜 저런 '나쁜 자막' 많이 보이는지 의아했기 때문입니다. 근데 알고 보니 로컬 수입사 작품은 한국에서 TC를 찍으니까 문제가 없는데 헐리우드 영화사 직배 작품은 현지에서 스파팅을 해서 오기 때문에 한국의 번역자가 스파팅을 건드릴 수가 없거나, 건드리기 힘들다는군요. 

그 말을 들으니 일견 이해가 되긴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컨대 예문으로 든 저 자막의 경우 대사의 길이를 감안하면 앞의 자막 노출 시간은 대략 3, 4초 정도 되겠고, 뒤의 자막 노출 시간은 1~2초 안쪽이 되겠는데 스파팅은 그대로 두고 문장만 나눠 버릴 경우 좀 문제가 있겠죠?

즉, 뒤의 자막의 노출 시간은 1초~2초 안쪽인데 '날이 밝는 대로 짐을 챙겨서 출발하자'를 거기다 넣어 버리면 읽을 시간이 부족하겠죠. 

하지만! 프로라면 저렇게 그냥 놔두면 안 되죠. 그래도 더 매끄러운 자막, 더 자연스러운 한글 문장에 되도록 머리 싸매고 고민해 봐야 되는 거죠. 즉, 원래의 스파팅을 그대로 두고 번역해야 하는 경우에도 아래와 같이 나눠 주는 노력을 해 줘야 하는 거죠.

이젠 여기 있을 이유가 없으니
얼른 짐 챙겨 놔

날 밝는 대로 떠나게


근데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도저히 마땅한 번역이 떠오르지 않을 경우도 있을 겁니다, 대사 내용에 따라서는요. 
저는 일본어지만 간혹 DVD 번역 같은 경우 영어에 맞춰진 스파팅 건드리지 말고 번역하라는 경우가 있는데, 저 역시 그런 스파팅 때문에 고충을 겪은 적이 있거든요.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도저히 적절한 번역이 안 떠오른 경우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영화에 그와 같은 '나쁜 자막'이 한두 개도 아니고 군데군데 보인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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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17 폴리오  
좋은 내용 잘 봤습니다.
수학, 영어 과목도 먼저 국어가 기본적으로 되어야 성적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지요.
영화 자막작업은 국어실력에 가독성을 고려해야 하는 더 힘든 일이겠군요.
24 umma55  
자막초짜로서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1 TEAMWARP3  
매우 적절한 지적입니다.
21 앵두봉봉  
좋은 글 감사합니다
2 유카츠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