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요람’ 서원, 특정 정파 인물 추앙 정치색 띠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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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요람’ 서원, 특정 정파 인물 추앙 정치색 띠기도

국립전주박물관 ‘서원…’ 기획전 8월까지 / 대유학자 사표… 지역사회 공론 만들어 / 서원 초상화는 배향된 인물 존경 수단 / 고려충신 정몽주 전국 19곳 서원서 모셔 / 송시열은 조선 서원서 가장 많이 배향 / 17세기 붕당정치 심화 당파성 이어져

“사림(士林)들인들 어느 누가 공경하지 않겠는가?”

정조가 1778년 지은 시에서 밝힌 송시열에 대한 평가다. “내뱉는 말씀은 모두 이치에 합당”했고, “아름답게도 학문의 우두머리”가 된 그를 선비라면 누구나 존경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송시열이 조선의 서원에서 가장 많이 배향된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조의 애정이 유별난 것은 아닌 듯도 보인다. 그러나 송시열은 굉장히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1694년 그를 도봉서원에 향사해 추모하는 것을 두고 노론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한 것은 한 사례다.

송시열의 사례에서 조선 서원의 복합적 성격이 드러난다. 서원은 선대의 대유학자를 스승으로 삼아 지역 사회의 공론을 만들고, 지성의 요람이 됐다. 동시에 특정 정파를 대표하는 인물을 배향함으로써 정치색을 표현하기도 했다.

국립전주박물관이 다음달까지 개최하는 기획전 ‘서원,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기르다’에서 엿볼 수 있는 서원의 면모다.

정몽주는 조선 선비들의 깊은 존경과 추모의 대상인 인물로 여러 곳의 서원에서 배향됐다. 정몽주 초상화가 지금도 여러 점 전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사진은 보물 1110-1호인 임고서원의 정몽주 초상화.

◆조선의 서원에서 되살아난 고려의 마지막 충신

1924년 화가 채용신은 최치원의 초상화를 그렸다. 경남 하동의 쌍계사에 보관되다 1784년 무성서원에 봉안된 그림을 모사한 것이다. 채용신의 것을 포함해 현전하는 최치원 초상화는 19점. 신라 시대를 살았던 최치원의 초상화가 긴 시간이 지난 조선에서 반복적으로 제작된 데는 서원의 초상화 제작 전통이 작용했다.

서원의 초상화는 배향된 인물에 대한 존경, 추모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에서 유학을 도입한 안향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처음이었다. 초기 서원에는 최치원, 안향처럼 붕당을 초월해 전체 유림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 배향되는 경향이 강했다. 정몽주가 대표적이다.

정몽주를 배향한 서원은 전국 18곳에 달했다. 이런 서원의 건립이 특정시기에 집중된 게 아니라 조선의 전 시기에 걸쳐 이어졌다는 점은 정몽주의 특별한 위상을 보여준다. 정몽주의 초상화가 지금도 여러 점이 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고서원 소장본은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이다. 옥산서원에도 전하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초상화는 숭양서원의 것을 모사했다. 전주박물관 민길홍 학예연구사는 “최초의 정몽주 초상은 고려 공양왕 2년(1390) 공신에 책봉된 것을 기념해 제작됐다”며 “이것을 원본으로 16세기 이후 서원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그려졌다”고 소개했다. 조선 초의 명재상인 황희의 초상화도 비슷한 맥락에서 제작됐다. 황희의 초상화는 옥동서원본이 기준이 되었고 창계서원, 화산서원 등에 전한다.

송시열은 조선시대 서원에 가장 많이 배향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서원의 당파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사진은 국보 239호인 송시열 초상화.

◆송시열이 이황보다 낫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특정 인물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 존경의 표시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서원의 배향 인물 선정도 그랬다. 특히 17세기 이후 붕당정치가 심화되면서 배향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졌다. 이하곤의 ‘남유록’은 서원의 이런 당파성을 잘 보여준다.

이하곤은 1722년 10∼12월 호남지역을 돌아본 여정을 남유록에 상세하게 기록했다.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지나간 지역에 50여 개의 서원이 있었는데 방문한 곳은 녹동서원, 창계서원, 제월당서원 3곳뿐이라는 사실이다. 유학자인 그가 27곳의 사찰, 암자를 방문한 사실을 감안하면 희한하기까지 하다. 그가 노론 명문가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런 행보가 가능했다. 노론과 연결된 지방 세력이 세운 서원만을 찾아 참배했던 것이다.

서원 당파성은 송시열과 관련된 것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송시열의 대표 서원은 1696년 세워진 화양서원. 송시열의 후손인 송환기는 1761년 이황의 자취가 짙은 청량산을 유람한 뒤 남긴 글에서 “이 산은… 천석(泉石·경치)의 뛰어남은 부족하고… 완상하는 운치는 적다”며 “내 관점으로는 화양이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것에는 훨씬 못 미친다”고 적었다. 청량산에 대한 화양의 비교우위를 주장함으로써 송시열을 필두로 한 노론 중심의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런 관점은 “송환기만이 아니라 노론 세력에 의해 계속해서 이어졌다”고 한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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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면 썩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