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V 페라리 : To infinity… and beyond!

영화감상평

포드 V 페라리 : To infinity… and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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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자동차 산업은 미국의 모든 것이었다. 미국의 몸통이고 미국의 영혼이었다. 역사가 일천한 신대륙은 달리는 기계몸의 역사에 천착했다. 산업혁명과 함께 찾아온 물질문명의 역사를 자기들 것으로 내재화시키고 신화로 만들었다. 야구가 그랬듯 자동차 역시 미국/미국인의 상징이 되었다. 핸리 포드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아버지였고 포드 제국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영화(榮華)를 누린 제국은 서서히 몰락하기 마련. 컨베이어 시스템과 공장식 분업화에 따른 대량생산은 포드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차를 만들어 파는 회사로 만들었지만, 비대해진 외형과 달리 페라리 포르쉐 등 유럽 차에 밀려 점차 우스갯거리로 전락하고 있었다. 원조의 자존심과 영광은 희미해지고 비효율적인 괴물이 되어 점점 쇠락해 가고 있을 때, 영화 <포드 V 페라리>는 그 지점 어디쯤에서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질주하는 스포츠카의 굉음이 고막과 심장 판막을 때린다. 속도가 관통하는 고요 속에서 캐롤 셸비(맷 데이먼)의 내레이션이 몸을 비집고 들어온다. 캐롤 셸비는 7000rpm 너머의 세계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공간과 시간을 관통하는 속도만이 존재하는 세계, 미친 듯한 속도와 드라이버(실존적 자아)가 오롯이 마주한 경계의 언저리에서 정신과 물질은 한 덩이로 뭉치며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누구냐 넌(Who are You)?' 기계몸의 속도가 인간을 실존적 질의와 대면시키는 아이러니.

영화 <포드 V 페라리>는 '(산업)자본'과 '(인간)열정'의 대결 구도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극의 긴장감은 거기에서 온다. 몸의 언어로 극을 밀고 나가는 쾌감. 돈은 얼마든지 댈 테니, 페라리를 꺾을 수 있는(포드 회장은 엔초 페라리 회장에게 수모를 당한다. '돼지'라는 인신공격이나 '쓰레기' 같은 임직원들에 대한 비아냥에도 끄떡없던 그의 자존심을 뭉갠 것은 '당신은 핸리 포드가 아니다. 핸리 포드 2세다'라는 페라리 회장의 뼈 때리는 지적) 스포츠카를 만들어 달라는 핸리 포드 2세의 주문에, '르망 24 레이스'의 유일한 미국인 우승자 캐롤 셸비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지만, 운전대 뒤에 앉은 드라이버, 그 차에 대해서 잘 알고 미친 듯 속도를 즐길 수 있는 '순수한 열정의 드라이버'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고.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는 그런 남자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거대하고 순수한 열정을 가진. 켄 마일스는 캐롤 셸비가 '이 친구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밀어붙인 이유를 러닝타임 152분 동안 스스로 입증한다. 그가 원한 것은 우승 트로피가 아니라 '완벽한 레이스'였다. 집착할 무언가를 향해서 몸이 으스러져라 맹렬히 달려가는 짐승 같은 순수함을 가진 사람, '속도'와 '나', 둘밖에 없는 좁고 외로운 공간에서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남자.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는 미쳤다. 레이스에 몰입하는 순간, 그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뜨거운 감정과 차가운 이성이 뒤섞인 추상화 같은 풍경. 그 안에 스포츠카 경주의 승부욕, 속도감, 긴장감, 행복함이 터질 듯하게 담겼다. 그는 달리는 짐승의 몸통 속에 앉아서 '영원한 순간'을 조금씩 늘려간다. 꿈에 그리던 '르망 24 레이스'보다 뜨거웠던 순간은, 어린 아들 피터(노아 주프)가 그린 르망 레이싱 트랙의 지도를 함께 보며 '완벽한 랩'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설명해 주던 그때였다. 그때 나는 직감했다. 켄의 목표는 우승이 아니라는 것을. 켄은 우승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밀리언 달러 베이비> 생각이 났다. 끝이 보여도 달리는 거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미친 듯 몸을 던지는 거지. 메기(힐러리 스웽크)는 '슬픔을 아는 파이터'였고 켄 마일스는 '순수한 기쁨'을 아는 드라이버였다. 그의 '미친 순수'를 보며 까닭 모르게 왈칵 뜨거운 것이 비어져 나왔다. 차 밑에서 뒹굴며 기름밥을 먹은 엔지니어들(캐롤 셸비, 켄 마일스, 엔초 페라리)은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존중한다. 진정한 경쟁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기계와 몸으로 대화하는 이들에게 말은 쓸모가 없지만 스패너 같은 공구는 쓸모가 있다. 손에 잡히는 확실성의 세계.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 캐롤 셸비가 켄의 스패너를 들고 피터에게 공구의 쓸모에 대해 교훈을 들려주는 마지막 장면과, 자신의 돈을 쏟아부어 만든 스포츠카를 직접 시승해 본 핸리 포드 주니어가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포드 V 페라리>는 미국 자동차 산업에 바치는 헌사 같은 영화다. 규정을 깨고 한계를 없애는 사람들의 순수한 도전과 열정에 대한 이야기, 무언가에 미쳐 끝까지 가고야 마는 '아메리칸 드림'의 영광스러운 순간에 대한 묘비명. 캐롤 셸비와 켄 마일스는 자신들의 피, 땀, 눈물을 담아 GT 40을 제작했다. 르망 24 레이싱에서 4년 연속 우승을 거머쥐었던 유일한 미국 차 GT 40과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그랜 토리노>의 그랜 토리노는 묘하게 닮았다. 오랜만에 '몸을 쓰며 본' 영화였다. 영화의 시간을 몸으로 밀고 나가는 쾌감이 만만치 않다. 기승전결 스토리가 있고 몇 분마다 죽이는 대사들이 빵빵 터지는, 뉴트로 풍의 올드스쿨 스타일 무비. 행복한 포만감을 느끼며 극장 문을 나섰다.

(뱀다리)

1) 영화가 끝나자 스티브 맥퀸의 <르망>(1971)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2) 대사와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원작이 있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오리지널 스크립트. 맨골드 감독의 장르적 연금술과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캅 랜드>, <처음 만나는 자유>, <케이트 앤 레오폴드>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강렬한 인상을 줬던 작품은 역시 <아이덴티티>와 <3 : 10 투 유마>, 그리고 <로건>. 적지 않은 나이(1963년생)에 할리우드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 꾸준히 진화했다는 증거다. "녀석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려면 한계가 어딘지 알아야 해." 같은 죽이는 대사들 많았지만, 그래도 나의 최고는 이것 : "샴페인은 아니지만 거품은 있어." 실력은 최고지만 인성 문제로 부사장의 눈밖에 난 켄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고 정비 공장에 혼자 남아 있을 때, 아내 몰리(케이트리오나 발피)가 맥주를 건네며 한 말.

3) 2019년 외국영화 베스트 10 레이스에서 가장 늦게 출발한 <포드 V 페라리>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내 마음에 훅 치고 들어왔다. 점찍어 두었던 다른 영화들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백미러로 보게 만들면서. 아직 <나이브스 아웃>과 <두 교황> 등이 남았다. 역시 게임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ㅎ

4) <앙코르> 같은 음악 영화를 만든 감독인데 멋진 사운드트랙이나 삽입곡 '한 방'이 없는 건 몹시 아쉽다. 그 멋진 이미지에 매혹적인 노래 한 곡만 제대로 얹었더라면...

5) 속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소리로 느끼는 것이라는 것을 영암 서킷에 가서 F1 레이스를 보고 알았다. 그날, 영혼까지 뒤흔들던 굉음의 진동이라니...! 그 소리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지경이었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리라. 그 속도의 쾌감을.

6) 스크린 X로 보길 잘했다. 넓어진 시야는 레이싱 카를 타고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스크린 X로 처음 본 영화가 <고산자, 대동여지도>였는데, 이게 뭐야? 싶었거든. 스크린 X라는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고. 그런데 <포드 V 페라리>는 특별한 영화관(4D, 아이맥스, 스크린 X 등)의 존재 의의를 확실히 증명하는 영화다. 사운드가 빵빵한 극장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보십사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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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13 리시츠키  
글 읽어보고 예고편 봤는데, 극장에서 보면 엄청나겠네요~
예고편 속 크리스챤 베일의 표정연기가 왠지 능글맞아 보이는게, 그의 연기도 기대됩니다;-)
제임스 맨골드는 <나잇 & 데이>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감독은 움직임과 속도를 찍을 수 있는 감독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거던요.
제가 모는 차가 포드 머스탱이라 이 영화가 더 기대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20 암수  
레이싱 영화는 언제봐도 매력적입니다...
일단 생각나는 레이싱 영화가 <르망>, <세나>, <드리븐>, <러시> 정도이군요......
이 영화들보다 더 뛰어난 영화인지도 궁금하네요...
맨골드 감독의 연출력이야 믿을만하고.........이감독의 95년작 <헤비>가 무척 보고싶은데....볼 기회가 엄네요..
10 사라만두  
글 또한 맨골드 영화처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이 느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