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스크

영화감상평

쿠르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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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는 잠수함 영화가 아니다. 재난 영화다. 당신이 <붉은 10월>이나 <크림슨 타이드> 혹은 <U 보트>와 같은 영화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 차라리 위에 얘기한 세 편의 영화보다 다운그레이드 됐지만 재미만큼은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헌터 킬러>를 보는 게 당신의 취미 생활과 정신 건강에 유익할 것이다.

<헌터 킬러>는 제목 그대로 '시간을 잡아먹는(킬링타임용)' 영화이지만 <쿠르스크>는 보는 이의 심금과 심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영화다. <쿠르스크>는 밀실의 공포, 그리고 시간과 싸우는(영화에서 해군들의 시계는 몹시 중요한 소재) 영화다. 게다가 실화다. 마누라에게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팁만 들은 채 극장에 갔을 때, 나는 (우리 부부 포함) 토요일 아침부터 조조영화를 보러 온 단 네 명의 관객이 히터도 돌지 않는 냉골 극장에 앉아 냉전시대의 논리를 깨는 극적 구조의 희열을 맛볼 거라 기대했다.

재난 영화에 감동 코드가 있다면 재난 상황을 이겨내려는 용기와 불굴의 의지, 구조자들의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헌신 같은 화소들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쿠르스크>의 감동 코드는 좀 유별나다. <쿠르스크>는 시종일관 미샤(소련 핵잠수함 승무원인 미하일의 어린 아들)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아이의 순수한 눈에 비친 뒤틀린 코미디(소련 정부의 권위주의와 무능이 어떻게 비극을 만드는가, 국가 안보를 내세우는 체면치레가 사람 목숨을 담보로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 <쿠르스크>를 보러 간 것은 순전히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 때문이었다. 악의 없는 거짓말이 어떻게 한 남자의 완벽했던 세계를 무너뜨리는지를 집요하게 다룬 영화 <더 헌트>(2012)를 보고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토마스 빈터베르크의 이력은 독특하다. <셀레브레이션>으로 '도그마 95 선언'을 영화로 구현했던 그는, 돌연 도그마 선언을 탈퇴하면서 도그마 선언의 모든 규칙을 깨는 영화 <올 어바웃 러브>를 찍었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는 몹시 실망스러웠지만, <사랑의 시대>(2016)는 '도그마 95' 시절을 떠올릴 만큼 신선했다.

그랬던 빈터베르크 감독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련 핵잠수함 '쿠르스크'호의 침몰 실화를 들고 돌아왔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미하일 역)와 쿠르스크 승무원 역 모두의 연기는 잠수함 격실 장면들 만큼이나 사실적이었고, 배역을 위해 한껏 살을 찌운 레아 세이두(미하일의 아내 타냐 역)의 감정 연기 역시 극의 몰입도를 한껏 높여주었다. 콜린 퍼스와 막스 폰 시도우의 관록 연기 역시 <쿠르스크>를 한층 입체적으로 만든다.

<쿠르스크>는 냉전 시대 소련 사회의 한 단면을 냉철하게 고발하고 있지만, 시대가 낳았던 비극은 시간을 초월해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주제를 전한다. 영화를 보면서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씨의 사망사고가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국가/시스템이 개인의 존엄보다 우선하는 사회적 비극은 <쿠르스크> 이후에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슬픔과 곤혹스러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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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S 줄리아노  
독소 대전차전 "쿠르스크"를 상상했었는데
잠수함 재난 영화였군요...ㅋ
<그레이 레이디 다운>이나 <위도우 메이커 K-19>보다
많이 낫기를 기대합니다.^^
14 스눞  
영화의 포인트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잠수함 영화로 놓고 보면 <붉은 10월>이나 <크림슨 타이드>보다는 박진감이 떨어져도
<그레이 레이디 다운>보다는 나은 듯 합니다(순전히 개인적 취향입니다 ㅎㅎ).

어찌 보면 캐스린 비글로우 감독의 <위도우 메이커 K-19>와 비슷합니다.
이것도 순전히 제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ㅎㅎㅎ


영화를 보신 분들은 세월호나 천안함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추카추카 6 Lucky Po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