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남김] 암수살인

영화감상평

[급하게 남김] 암수살인

29 율Elsa 2 1848 0

<살인의 추억>의 대척점에서 들여다본다. 지금 이곳에 대한 현미경과 망원경.

평점 8/10


방금 <암수살인>을 보고 나와 급하게 이 글을 씁니다. 오랜만에 한국영화 중에서 긴 글을 써보고 싶은 작품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주부터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을 하고 폐막까지 꾸준히 영화제를 왔다갔다 하기로 마음 먹은 지라 긴 글로 정리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 것 같아서 짧고 급하게 나마 글을 남깁니다. 긴 글로 완성되어도 예전처럼 졸문에 불과할 것이고 지금 이 글도 아직 생각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쓰는 것이라 두서가 많이 없을 것입니다. 이 점 감안해주시고 "제 생각은 이렇구나" 라며 너그러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제가 생각하기로는 <암수살인>은 기존 한국 형사물에서 도약한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사물은 일종의 슈퍼히어로 장르와 같은 속성을 지녀서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끝내 범인을 잡는 형사나 경찰을 보면서 통쾌한 쾌감을 느낍니다. 형사와 범인 간의 심리전과 추격전이 주가 되죠. 형사는 범행에 대해 단서를 획득하고 그 단서를 기반으로 범인을 쫓습니다. <암수살인>은 이걸 뒤집어놓습니다. 물론 실제사건이 이렇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감독의 도발적인 야심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뒤집힌 패러다임은 관객을 도발시키기에 충분합니다. 형사는 사라진 피해자들을 찾아내서 범인의 증술이 진실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되게 역설적입니다. 신선하기도 하고요. 이 도발의 심리전에 관객은 멱살이 잡힌 채로 질질 끌려다니는 듯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암수살인>은 사건의 범인에서 피해자로 시선의 방향을 바꿔놓습니다. 그리고는 왜 이 피해자들을 찾아내야만 하는지 관객을 설득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꽤나 인간적인 면모를 보았습니다. 이 지점은 <극비수사>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조금 더 무게를 둡니다. "경찰을 믿지 못한다"는 피해자 유가족의 말은 마음 속 정곡을 찌릅니다. 그게 <암수살인>이 시대를 보여주는 관통적인 메시지라고 생각이 드네요.


결국에는 명분입니다. 형사는 사건을 추적할 명분이 필요합니다. <암수살인>의 김형민 형사(김윤석)은 가장 모범적인 형사입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소신이 있고 피해자 유가족에게 공감할 줄 아며 범죄를 저지른 범인에게는 합당한 처벌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정의로운 영웅상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심지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사비도 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당한 증거와 절차에 따라 사법절차를 진행합니다. 감정이 앞서서 거짓 증거를 제출하거나 진짜 증거를 침묵하여 범인의 형량을 더 올리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기존 형사물에서 보았던 형사들보다 더 이성적이고 정직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정의보다 실적에 더 관심이 있는 경찰 내부에서 이 영웅은 고립되어 있습니다. 경찰 조직과 김형민 형사는 정확하게 대비를 이룹니다. 이 대비를 통해서 김형민 형사의 소신과 신념에 대해 접근하고 설득력 있게 설파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대비를 상기시킴으로서 현재 이곳의 사회에서 찾기 힘든 소신과 신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부산이라는 배경은 한국적인 개성이 묻어있는 도시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떨 때 잘 만든 연출은 영화에서 숨겨지는 법입니다. <암수살인>은 편집과 플롯, 촬영과 음악에서 아주 매끄럽습니다. 특히나 김형민과 강태오(주지훈)가 마주앉아 있는 장면들은 정말 칼 같습니다. 마치 길게 이어지는 탁구 게임을 보는 듯합니다. 정확하게 짜여진 프레임과 칼 같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편집의 리듬. 이 장면의 긴장감은 자연스럽게 미스터리로 연결됩니다. 정말로 사람을 죽인 건지, 아니면 부풀려서 증언한 건지, 거짓인지 끊임없이 의심의 여지를 던지면서 긴장감을 더해갑니다. 이 의심을 여지를 남기는 플롯의 영리함이 놀랍습니다. 영화가 당시 살해 현장을 직접적으로 관객의 눈 앞에 재현하면서도 관객더러 그것을 계속 의심하게 만듭니다. 사건의 퍼즐이 맞추어지면서도 몇몇 지점이 강태오의 증언과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또는 자세한 부분에 대해서 강태오는 침묵하기 때문에 이 플래시백들은 김형민의 상상인지, 과거의 진실인지 분간하기가 힘듭니다. 이 플래시백은 진실로 보이게 만들지만 애초에 전제와 떡밥, 결말로만 만들어진 퍼즐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정의되기가 힘듭니다. 이 영화는 강태오가 벌이는 김형민의 추리 게임이지만, 어쩌면 연출이 벌이는 관객과의 퍼즐게임으로도 보입니다. 


우직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김윤석과 속을 알 수 없고 냉철한 주지훈의 명연기가 에너지를 강렬히 내뿜습니다.


영화는 미제사건을 끝내 마무리하려는 대신 빈 공간으로 남겨놓습니다. 이 빈 공간에서 저는 어떤 희망을 그리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계속 <살인의 추억>이 떠올랐는데, <살인의 추억>의 과정는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대한민국의 시대상을 공통적으로 묘사합니다. 대신 <살인의 추억>이 시대를 살아간 인간의 실패에 대한 좌절이라면 <암수살인>은 그 실패에서 희망을 봅니다. 윤곽이 보이지 않는 사건을 쫓는 어떤 인간적인 신념에 명치끝이 아리도록 뻐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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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4 이강도  
희망 가져도 됩니까

황해 이후에 2010년도에 볼만한 남조선 영화 자체를 못찾겠던데
30 가일123  
명쾌한 뒷풀이로 영화를 해석해 주셨군요.
많이 공감이 가는 부분이며 감상평 잘 읽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