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평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방황과 희망의 무게에 대하여

28 율Elsa 2 88 0 0

섣부른 위로와 희망보다 앞서는 삶의 오롯한 무게와 회의감.

평점 ★★★★

 

#힐링 시네마(?)

영화는 영화로만 기억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떻게든 관객의 감각과 경험에 침투하여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걸 뛰어넘은 가치로 남기를 바란다. 좋은 영화는 영화인 걸 잊게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특히 ‘힐링 시네마’는 관객의 삶과 영화를 최대한 겹쳐놓으려 한다.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에는 위로라는 것이 필요하고,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이해하는 과정과 소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힐링 시네마’는 관객과의 소통이자 상담의 시네마다. 관객과 삶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우리 삶 속의 다양한 문제를 치유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이하 <맨체스터>)도 힐링 시네마의 궤를 일정 부분 같이 한다. 상실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고 누군가와의 이해와 소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맨체스터>는 낭만적인 희망을 거둬들인다. 충분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비극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관용구를 다는 것을 꺼린다. 대신 회의감에 빠진다. 힐링 시네마는 낭만이다.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는 치유될 거라고 넌지시 말하는 낭만. <맨체스터>는 그 낭만에 대하여 반문한다. “과연 한 인간의 내면의 상처와 트라우마가 그렇게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인가?”

 

#견뎌냄 or 견디다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은 감정이 가득 차 있다. 잡역부로 일하면서 능숙하게 배관을 그치다가도 불만을 거칠게 터뜨리는 주민에게는 그에 맞서 거친 욕을 한다. 하루 일이 마무리되고 술집에서는 어떤 여자의 실수로 술을 쏟아 옷을 더럽히게 되고 (괜찮다고 하지만) 그것이 발화점이 되어 두 남자에게 쳐다본다는 빌미로 시비를 걸고 싸움을 한다. 그는 감정을 끝끝내 숨기려하다가도 이내 폭발하는 성미다. 영화를 30분 정도 보면 우리는 무표정으로 살아가는 그의 과거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있었기데 무기력하고 기계적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일까?’. 그리고 리의 충격적인 과거를 만나게 될 때 그에 대한 동사를 바꾸게 된다. ‘견뎌내다’에서 ‘견디다’로. 전자가 현재완료형인 의미가 강하다면 후자는 현재진행형인 의미가 강하다. 그의 과거는 그에게 영혼이 찢어지고 견디기 힘든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상처의 무게를 견디는 중이고 트라우마를 회피하면서 무표정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다.

 

<맨체스터>에서 카메라는 리더러 과거를 마주하고 이야기해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하서 자세하게 구술하는 인물은 거의 없다. 리에 대한 말이 오가고 사람들도 그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모두 다 말을 꺼린다. 그래서 영화는 리의 플래시백 방식을 통하여 그의 과거를 따라간다. 그렇지만 그것도 영화에 전반적으로 설치된, 인물들의 반응을 모두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선착장의 상점에서 리가 일자리를 찾는다고 방문했을 때 (남자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저 사람 다시는 못 오게 해”라고 말하는 거라던가, 골목에서 우연히 리와 랜디가 마주쳤을 때 랜디가 울음을 쏟아내며 “그때 그런 말 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랜디가 말한 ‘그때’가 언제인지도 불분명하고 그에 때라서 ‘그런 말’이 어떤 말인지 짐작이 잘 되지 않는다. 영화의 플래시백은 리의 집에 화재가 나고 나서 랜디와 이혼하고 맨체스터를 떠나기로 결심한 리의 과정이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의 틈을 벌려놓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맨체스터>의 플래시백은 현재의 이야기에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관객을 당황하게 한다. 이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철저한 대비효과다. 단란하고 화목했던 과거와 가정이 파괴되고 상처 입은 현재의 대비는 리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장치이다. 영화는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라는 표면적 질문에 대해서 대답 대신 과거라는 짐을 짊어지고 견디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닷가 맨체스터의 겨울 풍경이 그에게 수렴된다.

 

#소통

내가 기억하기로 리가 ‘현재’ 시퀀스에서 리가 웃음을 보이는 장면은 딱 하나다. 리가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목되고 아직 미성년자인 패트릭의 경제적 부분을 관리하게 된다. 패트릭은 죽은 아버지 조의 유산인 배를 팔고 싶어하지 않지만 리는 모터가 수명이 거의 다 했고 관리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를 팔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패트릭이 냉장고의 냉동 닭을 보며 ‘아버지를 냉동고에 보관하지 싫다’며 울음을 터뜨리고 초대로 찾아간 친어머니의 집에서 거절당하자, 그 후 리는 조의 집에 있는 총을 팔아 모터 살 돈을 마련한다. 그리고 패트릭과 그의 여자친구 (중 한 명), 그리고 리가 그 배를 타고 바닷가를 항해한다. 그리고 리는 웃음을 지어보인다.

 

‘힐링 시네마’의 영원한 테마는 소통이다. 서로 불협화음을 이루는 두 이상의 개인 또는 집단이 서로를 이해하가고 소통하는 방법을 깨달아가는, 관객에 따라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재단된 테마. <맨체스터>도 소통에 대한 메타포를 찾아볼 수 있다. 리가 패트릭을 만나서 병원 앞에서 패트릭에게 ‘들어가서 아버지의 시체를 볼 거냐’고 물어본다. 패트릭은 고민하다가 ‘Just go'(번역된 자막으로는 ’그냥 가자‘라고 번역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리는 자동차를 출발시키려 하고 패트릭은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한다. 둘의 대화는 어긋난 것이다. 그 이후로도 조의 유산, 패트릭의 경제권을 두고 후견인 리와 피후견인 패트릭이 의견 차이를 보이고 대화는 자꾸 어긋난다. 장의사를 만나고 나온 뒤에 조의 시신 보관 방식을 두고 둘이 여전히 다투는 도중 둘은 자동차 위치를 잊어버린다.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방황하는 둘의 모습은 현재 그들의 심리를 넌지시 나타내보인다. 그러다가 리가 패트릭의 내면의 상처를 보게 되고 패트릭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아니면 누가 돌보냐‘고 말하며 죽은 자의 책임을 짊어진 그에게 과거의 상처를 견뎌낼 수 있는 희망이 엿보인 것이다.

 

그 희망을 거두어가는 것인 랜디와 리가 골목에서 다시 만났을 때다. 우연적이고 사적으로 마주친 그들은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랜디는 진솔하게 이야기하지만 리는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듯 아무렇지 않다고, 괜찮다고 거짓말하며 다급하게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술집에서 몸을 부딪힌 남자와 전보다도 격한 싸움을 벌인다. 시간이 지나도 흔적은 남는다. 영화는 그 흔적을 다시 상기시키고 다시 리를 관찰한다.

 

리가 가진 세 액자. 영화는 그 액자에 걸린 사진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 사진에 대한 리의 반응을 보여준다. 액자를 맨체스터로 챙겨 와 다시 액자를 꺼내고 나서 리는 사진을 잠시 본다. 그러고선 창가로 가서 주먹으로 창문을 쳐 깨뜨린다. 우리는 이 반응에서 액자의 사진은 랜디와 화목한 가정을 이뤘던 때의 가족들의 사진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액자 3개와 리의 세 아이는 대응될 수 있다.) 액자는 리에게 과거와 트라우마의 상징이다. 그에게 있어, 과거는 잊고 싶지만 스스로에게 잊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또는 극복해내야하는 것이지만 극복이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패트릭이 리의 세 액자를 보게 된 후, 그는 리에게 다가선다. 서로가 서로의 후견인이 된 듯한 이 모습은 묘한 울림을 준다.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 그들은 서로를 넌지시 위로한다. 그렇지만 리는 고백한다. “못 견디겠어”. 그에게 과거는 아직도 치유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안을 아무 말도 않는다. 리는 맨체스터를 떠난다.

 

리와 패트릭은 서로 닮았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두고도 아무렇지 않을 척하다가 억누른 감정을 터뜨리는 것과, 누군가의 내면의 상처를 보게 되면 다가서고 기다려주는 것까지 닮았다. <맨체스터>는 그것이 인물을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인물 스스로가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타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것. 영화는 섣부른 희망과 위로 대신 삶의 무게를 오롯히 옮겨놓는다. 어쩌면 <맨체스터>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누군가의 삶의 무게를 진정 이해할 수 있냐’고.

 

#희망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 <맨체스터>는 우울한 정서를 이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조의 입관식 때 다시 만난 리와 패트릭은 다시 배에 탄다. 그리고 영화는 같이 낚시를 하는 둘의 뒷모습으로 라스트 씬을 장식한다.

 

둘의 뒷모습에 담긴 오롯한 무게. 그리고 어떤 연대와 희망이 요동치는 듯하다. 진실된 절망을 느껴야 진실된 희망이 가능하다. <맨체스터>는 그 진실성에 진정성을 부여하면서 섣불리 위로하거나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냥 인물 곁에 머문다. 그 곁에서 진실된 절망을 느끼는 영화는 진실된 희망을 ‘느낀다’. 그들의 뒷모습은 아직 무겁지만 한결 가벼워보인다.

 

 

(원래 <블레이드 러너 2049>와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엮어서 디지털 시네마와 관객과의 거리에 대해서 평을 할려고 했습니다만, 어쩌다가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다가 생각이 나서 적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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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오랫만에 이 게시판에 들려 님의 글이 있어 정독했습니다. 검색하니 별도의 둥지가 없으신 듯 한데, 본인의 집 하나 마련하셔서 보관해두시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먼저 오타를 말씀드리죠. # 소통 단락의 두번째 문단에 '시체'를 '시네'로, 그 다음 문단에서 랜디를 '핸디'로 쓰셨습니다. 저처럼 막글을 쓰실 것이 아니시라면 가끔 퇴고하시는 습관도 필요합니다.
두번째 전체 글의 기조는 기존의 본편에 대한 평문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에서 신선하지 않다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좀 더 세부적인 것들, 아버지의 총, 패트릭의 여친들, 패트릭의 친모에 대한 일관적인 부정적 면모, 랜디의 재혼과 자녀들 등의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 장문의 글이 기대됩니다.
세번째 관습적이라서 외면하고 싶은 유사 부자관계 지점인데, 리와 패트릭이 실제로 친부자 관계일 가능성에 대해 다른 논자가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과연 리의 방화와 가족 참변만이 그의 과거인가라는 의외의 지적인데, 저는 그 지적도 타당하지만 님의 논지처럼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포개는 것 역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그 위에 성조기를 놓는다는 가정하에서 말이죠.
아직 국방부 소속이시겠지만, 자주 영화글 써 주세요. 충직한 독자로서 몫을 다하겠습니다.
28 율Elsa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안 보이셔서 사라지신 줄 알았네요.
오타는 제가 많이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죠. 노력하는데 모니터로만 읽다보니깐 자주 놓치고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거침없는 비판 감사드립니다. 저보다 더 많이 영화를 보셨고 식견도 넓으신데 제 졸문 읽어주시는 것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아직 글을 쓰는데 많이 부족한 제가 많이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