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aka - The Gleaners And I) -…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 aka - The Gleaners And I)
밀레의 그림 속 ‘이삭 줍는 여인들’은 왜 이삭을 줍고 있었을까? 그들이 먹기 위해서? 떨어진 이삭이 아까워서? 아니면 근면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아무도 이젠 이삭을 줍지 않아. 우리 어릴 땐 가족들이 함께 이삭을 주워다 모은 걸로 빵을 만들어 먹기도 했지. 이삭을 줍는 사람을 본 지도 오래 되었어.” - 한 노인의 인터뷰
아녜스 바르다는 단순한 질문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영화는 백과사전 속 G 챕터에서 ‘Gleaner(이삭 줍는 사람)'를 찾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세상 속 곳곳에 숨은 이삭 줍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이삭 줍는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들은 왜 이삭을 줍고 있는 걸까?
폐품 수집가/공예가,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의 요리사, 쓰레기통을 뒤지며 연명하는 사람들, 집시들, 새벽같이 장이 열리고 닫힌 뒤에 남겨진 것들 사이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 수확이 끝난 감자밭/과수원/포도원/양식장을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 이삭줍기는 우리의 시선 너머에서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르다는 꽤나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의 숭고한 행위를 말없이 비추고 있다.
그렇다, 이삭줍기에는 이유모를 숭고함이 있는 것이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은은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고급 식당에서의 만찬이 아니라, 우리는 이마에 송골히 맺힌 땀방울 하나에서, 그 땀방울이 애써 얻어낸 감자 몇 알에서 음식의 숭고함과 거룩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이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이고, 황지우의 라면 가닥과 국밥 한 숟갈이 ‘거룩’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큰 덩치로 분식점 메뉴 표를 가리고서 / 등 돌리고 라면 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 황지우, ‘거룩한 식사’
나는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삭줍기를 통해 그들의 삶을 보았다. 굵은 털복숭이 손으로 제 손가락 굵기 만한 감자 몇 알을 주워 담는 사람, 생물학 석사 학위를 들고도 쉼터를 전전하며 신문이나 잡지 따위를 팔고, 매일 아침 시장바닥에 널린 파슬리와 치커리 따위로 허기를 채우는 사람의 구부정한 허리가 관객을 ‘목메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 따위가 아니다. 시인의 표현 그대로 ‘몸에 한 세상 떠 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자,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들이 한껏 뿜어내는 따뜻한 입김이 마음 속 어떤 스위치를 건드리는 탓이다.
누군가 다큐멘터리와 보통의 영화 사이에 차이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기꺼이 전자의 예시로 들이밀 만한 작품이다. 보통 이런 종류의 소재에는 나쁘게 말해 ‘감성팔이’적 요소가 개입하는 게 다반사인데, 전혀 그런 것 없이 깔끔하다.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의 마음 한구석을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 1시간이 넘는 시간을 오직 인간의 삶만이 묵묵하게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