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아이덴티티 : 스릴러인 척하는 히어로물

영화감상평

23 아이덴티티 : 스릴러인 척하는 히어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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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고 생각했던 그가 돌아왔다.
'반전'의 사나이 M. 나이트 샤말란.

<빌리지>(2004) 이후 실로 오랜만이다.
정확히는 <언브레이커블>(2000) 이후 근 20년 만.

'반전'으로 대박을 친 사람,
그 '반전'에 평생 발목이 잡힌 감독,
데뷔작이 곧 대표작이 될 뻔한 사람,
<레이디 인 더 워터> 때부터 '훅- 갔다'라며
대중들 뇌리에서 점차 잊혀 간 사람.

<23 아이덴티티>는 자신이 마침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 시제라고 선언하는 영화다.
영화 곳곳에서 "나 아직 안 죽었어!"라고 외친다.

우리는 '반전'에 목을 매느라
샤말란이 훌륭한 '이야기꾼'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상처 입은 소녀(케이시)가 있다.
어린 시절, 날카로운 외상은 무기력의 공포와 함께 깊은 내상이 된다. 
상처는 육체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정신적인 것.
그녀는 폭력과 어둠의 기억 앞에 '사냥감'이고 '먹이'였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삼촌의 성폭력)에 여전히 저당잡힌 현재,
그녀는 상처 입은 채 우리 안을 어슬렁거리는 짐승처럼
어둠이 짙게 깔린 자기 세계 안에서 어슬렁거린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괴물(비스트)과 마주한다.
그 괴물은 스물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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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이덴티티>는 케빈(데니스/패트리샤/헤드윅...whatever)의 이야기이자
케이시의 이야기이다. 둘은 닮은꼴 거울상.

둘은 치열하게 대결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교감한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개의 문장 :

1) We are what we believe who we are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
2) The broken is more evolved (상처받은 사람은 진화한다/우월하다)
3) Say His name, Kevin Wendell Crumb (그의 이름을 불러, 케빈 웬델 크럼)

속에 이야기의 뼈대가 묻혀있다.

자기의 반영(Replection)을 현실에서 발견한 비스트는
"The broken is more evolved. Your heart is pure. Rejoice...!"라고 외치며 
케이시의 상처 입은 육체와 영혼을 찬양한다.

(엄마에게) 상처받으며 자란 케빈에게 상처받지 않은 자(납치한 소녀들)는 '불결하'다.
상처받은 자들만이 '순결한' 심장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케빈 속 23개의 인격체들은 상처를 통해 진화(= 상처를 극복)하고
진화의 결과물로 초월적인 스물네 번째 존재(비스트,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절대자)를 창조한다.

그들(23개의 인격)은 초월적 광기의 제의를 위해
'비스트'에게 3개의 '불결한' 희생양을 제물로 바치려 한다.

그렇게 납치해 온 제물 중에 상처 입은, 순결하고, 우월한 사람, '케이시'가 있다.
다른 두 친구와 달리 그녀는 납치된 상태에 저항하지 않는다.

오래 길들여진 어둠 속에서 체념을 체득한 케이시는
강간을 두려워 하는 친구에게 "오줌을 싸"라는 충고를 건넬 뿐이다.

그러던 케이시가 초월적 의지를 욕망하는 케빈(혹은 23개의 상처받은 인격체들)을 만나
새로운 상처를 겪고, 그 상처와 치열하게 싸우며 진화한다.

어둠(삼촌의 폭력과 저항의 무기력)의 포로였고 (근친상간이라는 굴절된 욕망의) 사냥감이자 먹이였던 케이시는
마침내, 자기 앞의 '비스트'에 맞서 그 존재를 사냥하고 '자기 감옥'으로부터 탈출한다.


문제는 나이트 샤말란의 빛나는 훈장이자 아킬레스건이었던 반전이 아니다.

샤말란은 우여곡절 끝에 '반전 없는 샤말란 영화'라는 통과제의를 지나
케빈과 케이시처럼 자기 굴레/한계를 살짝 벗어났다.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는 샤말란의 세계관은
욕망의 육체적 발현을 통해 실현된다.

다시 말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영화의 결말-괴물은 정신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 근육과 핏줄로 구현된 실체-이
<23 아이덴티티>의 가장 충격적인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케빈과 스물세 개의 인격이 현실 속에 육체의 괴물을 불러왔을 때
육체는 한계가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자 정신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언브레이커블>의 세계관이 다시 한 번 재활용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 : 비스트는 케이시가 '상처 입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녀를 풀어준다)
비스트는 자신의 적수(혹은 동지)를 보며 "Rejoice...! Rejoice....! (기뻐하라, 기뻐하라!)"고 외친다.


<23 아이덴티티>는 <언브레이커블>의 세계관에 <빌리지>의 중심 서사를 엮었다.
"영악한 재고정리" 라는 박평식 평론가의 비아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장르적 쾌감은 어쩔 것인가?
때론 교묘하게, 때론 뚝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어떻게 무시할 것인가?
다중인격(해리성 정신장애)이란 모티브를 끝끝내 히든카드로 숨겨 두었던 <아이덴티티>(2003)와 달리
처음부터 패를 까놓고 시작하는 이 자신감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언제나 관객보다 반 보는 앞서 나가는 샤말란의 상상력은?
그가 '휘발적 반전'에 맛들인 중독자라고?
반전 빼면 남는 게 뭐가 있냐고?

있다, 게다가 많다.

<아이덴티티>가 다중인격을 여러 명의 배우를 통해 시각화하고 그 모든 극의 진행이 한 사람(모태)의 머릿속 풍경이었다는 반전을 제시했다면
<23 아이덴티티>는 제임스 맥어보이라는 훌륭한 물감이자 놀라운 캔버스인 배우의 얼굴과 몸통 하나에 그 많은 인격을 우겨 넣어 펼쳐놓는 마술을 보여 준다. 
게다가 각기 다르게 꾸며진 방, 여러 개의 이름이 붙은 여러 개의 라커룸, 밀폐된 미로 같은 공간을 통해 외부와 단절된 채 자기들 인격끼리만 소통하고 있는 케빈의 머릿속을 시각화하고 있다.

거기에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능력,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기술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웬걸, 오히려 장르의 바깥에서 장르 규칙의 경계선을 들락거리며 관객들을 쥐락펴락 가지고 논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영악한 감독의 점묘화 같은 거대한 밑그림과 퍼즐 조각으로 하나씩 빈 공간을 맞춰 가는 치밀함, 그리고
다중인격을 묘사하는 세련되고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의 새로움이다.

케빈 안 23개 인격은 하나의 사회를 이룬다.
지배자가 있고 피지배자가 있으며 동조자가 있고 모반자도 있다.
여느 조직이 그렇듯 가장 순수한 악은 언제나 어린 영혼(헤드윅)의 몫이다. 
그들 사회는 드디어 자기들이 내세운 합리적 리더(배리)를 쿠테타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강력한 독재자, 정신의 초월자(비스트)를 불러들인다.
그 존재는 정치적 리더라기보다 종교적 사제에 가깝다.

치료를 위해 23개로 분리된 인격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플레처 박사에 맞서
23개로 조각난 그들은 납치한 소녀들을 초월적 존재의 강력한 힘에 제물로 바치고
소멸할지도 모를 각자의 인격을 지키려 힘을 모아 투쟁한다.

결국 그들은 자기 보전을 위해 합리/이성에 의한 통합이 아니라
비합리/야성에 몸을 내맡기고 스스로 야수의 먹이가 되어 초월적 존재에 흡수·통합된다.

샤말란의 놀라운 패는 이게 끝이 아니다.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면 결국은 납치된 소녀가 주인공이고,
스릴러인 줄 알고 따라 갔는데 알고 보니 히어로 장르였다는 것.

케빈은 케이시라는 여전사를 발견-발굴해서 세상에 내보내고
케이시는 야수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 힘을 각성하고 어둠에 맞선다.

야수는 '빌런' 엘리야 프라이스(일명 미스터 글래스 = 사무엘 잭슨)의 변주이고
케이시는 각성하기 전 '히어로' 데이빗 던(브루스 윌리스)의 여성형이다.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고 완성시킨다는 변증법적 과정까지 여지없이 닮았다.
(이 관계는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로 한 단계 진화한다)

<언브레이커블>의 세계관을 그대로 복사해 붙인 이 포스트-언브레이커블 서사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의 시발점(혹은 연결점)이라는 사실이 더 놀랍다.

무뎌진 두뇌의 녹을 털어내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 M. 나이트 샤말란을
케빈과 23 아이들의 마지막 대사 : 이제 뭘 하지? 그를 믿어야지. 그는 우리를 지켜줄 거야. 그가 한 일을 봐. 우리가 얼마나 강력해질 수 있는지를...처럼, 믿고 지켜볼 일이다.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중이니까.



*뱀다리

1)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씨네21 정지혜 기자의 논평, "전형의 답습, 소모되는 소녀들의 비명"에 난 반댈세. '거대한 떡밥'이 다라는 걸 알면서도 <클로버필드 10번지>에 기꺼이 낚이는 건 (어쨌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샤말란은 예상 가능한 장르의 규칙 안에서 살짝 어긋난 유희를 벌인다. 새롭진 않더라도 적어도 예측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2) <23 아이덴티티>의 가장 큰 성과는 반전의 피로감을 덜어냈다는 것.

3) 한국 영화 <스플릿>에 밀려 <23 아이덴티티>가 된 비운의 제목.

4) 제임스 맥어보이의 23면체 원맨쇼와 안야 테일러 조이의 원초적 포스를 경배하라!

5) "자격지심에 사로잡힌 범죄자가 소녀들을 제물 삼아 힘을 과시하는 이야기, 이젠 피로하다."(씨네21 이예지 기자)에 동의할 수 없다. 페미니즘의 잣대로 모든 영화(혹은 창작물)를 비평하는 일은 비평의 시야를 극도로 좁히는 비극을 초래한다. 제물 선택의 기준이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불결한 것들' 이었기에, 아이나 여자가 표적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전형의 답습, 소모되는 소녀들의 공포'는 적어도 <23 아이덴티티>엔 적합한 분석 틀이 아닌 것 같다. 데니스(다중인격 중 범죄자 캐릭터)가 극 초반 소녀들의 보호자인 아버지를 제압하고 소녀들을 탈취한 것만 봐도 제물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 하다. 그렇다면 성인 남성의 비명도 소모했던 <맨 인 더 다크>(2016) 영화는 새롭고 상큼한 영화인가? 장르의 규칙은 지겨운 동어반복의 역사다.

6) 영화 마지막에 깜짝 등장한 브루스 엉아의 포스는 정말 멋졌다. *_* 어쩌면 이 장면, <23 아이덴티티>가 <언브레이커블>의 10여 년 후 이야기라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이 아닐까 싶다.

7) 분명 뭔가 더 있을 것 같아서 기사를 찾아 읽다가 재밌는 빵 부스러기들을 발견했다. 이 영화는 실제 인물 '빌리 멀리건'을 소재로 만들었다는 것, 샤말란 감독은 <언브레이커블>을 만들 때 3부작으로 계획했다는 것, 마지막 장면의 브루스 윌리스 등장과 '미스터 글래스' 떡밥이 정말 제3부 '비스트'와 '데이빗 던'의 이야기로 이어질 것 같다는 것, 이미 제임스 맥어보이와 브루스 윌리스가 샤말란 감독의 새 작품에 캐스팅됐다는 것, 케빈이 꽃을 들고 찾아간 기차역은 <언브레이커블>에서 탈선 사고가 났던 그 역이고 당시 사고 때 케빈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기타 등등, 기타 등등. 아 이 흥미진진 한 퍼즐 조각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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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르 영화의 추종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기뻐하라, 기뻐하라!"

 

 

* 스누피 별점 : ★★★★★★★☆☆☆

 

 

#23아이덴티티
#반전의이야기꾼장르영화달인이되어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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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S 컷과송  
저로 하여금 다시 샤말란을 보게 하시는 글입니다. 전작까지 모두 접했으니 이번에도 넘겨버리지는 않겠습니다.
2 꿀호떡  
다중이 소름돋는 연기라니 기대되요.
14 막된장  
상처 투성이 끝에 탄생한 괴물과, 파괴되지 않는 히어로의 떡밥인건가요?  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