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바이 더 씨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영화감상평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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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뒷모습이 보이는 세계보다 더 많은 말을 건넨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어긋남'의 영화다.
예정된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갈 리 없는 우리네 인생...

그 어긋남이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출발점이다. 
어디로 갈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 아무도 알 수 없다.
알 길도 없고.


새 모터를 달아야 하는 고장 난 배처럼
'고장 난' 심장을 가진 사내가 있다.

그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자기를 밀어낸다.
밖을 향하든 안을 겨누든
분노/증오는 생명을 키워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상처를 만들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상처는 (아무리 깊더라도) 언젠간 아물게 돼 있다.

사람들 속에서 얻은 상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아물게 되는 게 세상의 이치.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것.

다른 생명을 키우고 보살피는 일이
자기 안에 꺼져가던 불꽃을 희미하게 되살려낸다. 

그게 (어쩔 수 없이) 인간이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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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아래로 깊숙이 몸을 숨긴 고통은
쉽게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고통은 어둠 속에 숨은 채
자신을 밑바닥까지 가혹하게 밀어붙이는 벌을 준다.

밤과 낮, 생명의 탄생과 소멸, 
헐벗은 겨울의 나뭇가지와 물 오른 봄날의 여린 잎들,
빛과 어둠은 결국 한 몸이다.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조금씩 천천히 변하는 계절의 징후처럼
상처와 고통 역시 느린 걸음으로 그러나 절대 멈추지 않고
우리 삶에 각자의 무늬를 새겨 넣는다.

리(케이시 애플랙)가 유리창을 맨주먹으로 깰 때,
감추고 있던 감정이 몸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처럼
유리창 밖 풍경 속에선
헐벗은 겨울나무의 나신을 지나
물 오른 나뭇가지 위로 초록의 잎들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리의 소리 없는 울음이자 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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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지루했던 겨울도 언젠가는 지나가듯
리의 마음의 풍경 속에도 하나둘씩 꽃망울이 터진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시집『겨울-나무로 부터 봄-나무에로』(민음사, 1984)






* 뱀다리 
1)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건포도 바게트' 같은 영화다. 겉(우리네 인생)은 딱딱하지만 듬성듬성 박힌 건포도(유머) 때문에 씹을 만 하고 살 만 하니까.  닥터 Beth-Bethany 농담과 Minnetonka, Minnesota 유머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피식피식 웃겼다.

2) 현재와 그 사이를 비집고 틈입하는 과거 회상 장면은 모두 컷으로 표현됐다. 디졸브나 페이드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처럼 날카로운 컷. 잊고 있던(아니, 잊으려고 몸부림쳤던) 과거는 여전히 선명하게 되살아나 고통을 상기시킨다. 시간과 의식의 흐름을 비집고 들이닥치는 리의 과거 회상 커트의 간격이 점점 빨라지던 순간의 시퀀스는 대치하는 인물들 간 대결 신만큼이나 긴장감이 넘쳤다.
 
3) 고개를 떨군 옆모습이나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보여 준 케이시 애플렉의 연기는 놀라웠다. 화면 점유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중심 서사에서 큰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던 리의 아내 랜디 역의 미셸 윌리엄스는 등장하는 순간마다 영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두 배우가 (드디어) 한 프레임에서 만났던 순간의 터질 듯한 긴장감은 흡사 서부영화의 결투 신 만큼이나 박진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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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뼈아픈 대화 장면을 보면서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까? 내가 미쳤거나 슬픔 안에 웃음의 페이소스를 담아내는 감독의 연출 솜씨가 미쳤거나, 둘 중 하나.

4) 케이시 애플랙의 성범죄 이력은 물 오른 그의 연기 커리어에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인가? 선댄스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아카데미까지 바라보다가 급하게 제동이 걸린 <국가의 탄생>의 네이트 파커(각본, 제작, 주연, 연출)와 대비되는 상황. 그가 만약 네이트 파커처럼 흑인에 영화계 신출내기였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할리우드의 영향력 있는 백인'이라는 프리미엄이 그의 윤리적 추락을 막아준 듯. 이 지점에서 늘 고민되는 문제 제기. 자연인으로서의 창작자(예술가)와 그의 작품을 어떻게 연결/분리해서 볼 것인가? 하는 문제.    

5) 음악이 하나같이 좋았다. 특히나 헨델의 음악과 화면의 조합은 주옥 그 자체.

6) 영화 장면 중 인상에 남는 것들은 대개 두 인물의 관계를 한 화면에 담을 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바로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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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프레임 창밖에 붉게 핀 꽃, 반지하 방을 감싼 어둠, 희미한 빛을 받으며 서있는 형 조(카일 챈들러)와 죄인인 듯 부감 같은 실루엣만 보이며 어둠 속에 서있는 리(케이시 애플렉), 그리고 두 인물 사이를 실처럼 끊어질 듯 연결해주는 어린 패트릭(조의 아들이자 리의 조카)이란 존재. 


* 스누피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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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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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 같은 감상평이다'라고 생각하며 글 읽어 내려갔는데 진짜 시였네요. ㅎㅎ 시 말미처럼 보스턴 가선 그랬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이입 제대로 됐던...
미네통카, 똥퍼씬, 냉동닭 등 웃픈 장면들이 곳곳에 나왔드랬죠. 음악은 플래시컷에 쓰였던 첫 헨델 곡에서 약간 부조화가 느껴진 것 빼곤 대체적으로 좋았습니다.
간만에 극장에서 눈물 흘리며 봤던 영화였답니다. 후반부부터 훌쩍거리다가 엔딩 풍광장면에선 주루룩...
감상평 잘 읽었습니다.
14 스눞  
네네, 황지우 시인의 시입니다. 영화 보는 내내 저 시 생각이 났지요. 그래서 리뷰 제목으로 가져다 썼고요. ㅎㅎ

냉동닭과 엠뷸런스 들 것 유머는 정말 아프고 웃겼어요. ㅋㅋ
내가 이 상황에서 웃어도 되나 하는데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 없었다는;; 울다가 웃다가 똥구멍에 털 난...ㅎㅎㅎ

저도 오랜만에 극장 어둠을 빌미로 훌쩍거렸던 영화입니다.
다니엘 블레이크 때의 그것보더 조금은 더 짙고 여운도 길었던. ㅎㅎ

주말 잘 보내시고요.
:)
S 컷과송  
저 시집이 집에 놓여있음으로 저와 비슷한 시간을 공유했음을 알 수 있네요. 지금 아트 큐브 조조로 보러 갑니다. 언제나 그렇듯 님의 글은 조회수가 차원이 다르네요. 저는 언제쯤 이런 시같은 글을 쓸 수 있으려는지...마지막 장면 사진에서 이 감독의 능력을 접합니다. 글을 블로그에서 그리고 여기서 두 번 읽었습니다. 극장 다녀와서 한번 더 읽도록 하겠습니다.
14 스눞  
아이고 별말씀을요.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재미나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리뷰 올리시면 저도 감사히 읽겠습니다.

네네, 시집이 처음 나왔을 당시에 구입했더랬지요. 그 당시는 정말 '시의 시대'라 할 만큼 시집을 사는 일도 흔한 일이었지요. 장정일, 이문재, 황동규, 유하, 고정희, 아 그리고 기형도의 시를 특히나 좋아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