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행자(行者, 2012)

영화감상평

[리뷰] 행자(行者, 2012)

28 율Elsa 1 1559 0

가끔 영화는 우리가 잊었던 것을 상기시켜준다.

평점 ★★★★★

 

오랜만에 글을 쓴다. 지난 한 달간 바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힘들다는 핑계로 게을러진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그 사이에 좋은 영화들은 많이 찾아보았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보면서 찜찜함과 불편함에 감탄했고, 두기봉 감독의 <대사건>을 보면서 오프닝에 감탄하기도 했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을 보면서 폭력과 예술의 세계의 경계에서 맴도는 현대인들의 고뇌를 보기도 하였지만 돈 코스카렐리 감독의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를 보면서 B급 영화의 난잡한 코미디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이번에 내가 글을 적게된 동기를 강력하게 불어넣어준 영화는 다름아닌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되시겠다. 영화 감상을 희망한다면 유튜브 검색을 하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27분이라는 짧은 단편영화이고 심지어 실험영화이지만 강렬한 인상과 무언가를 안겨준다.

 

본 영화는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를 주제로 하는 '뷰티풀 2012'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각각 세 명의 아시아 감독이 단편 한 편씩을 연출해서 만든 옴니버스 영화에서 <행자>는 차이밍량 감독이 연출했다.

 

영화의 내용은 한 승려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홍콩 시내를 계속 걸어다니는 것이 다다. 스토리라고는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카메라는 승려와 거리를 두고 행적만을 조용히 쫓는다. 영화는 딱 정해진 거리에서만 머물며 그 이상은 나아가지 않는다.

 

본편만을 두고 본다면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미디어 아트 범주에 더 가깝다. 다큐멘터리의 향기를 풍기기도 하지만, 행자인 승려는 차이밍량 감독의 페르소나 이강생이 연기했다. 전통적인 승려복을 입고 코스프레를 하면서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걷는 '연기'를 하고 있는 이강생은 차라리 행위 예술가에 가깝다.

 

차이밍량 감독은 그런 행위 에술을 프레임 내에 배치함으로서 피사체와 공간과의 대비를 이루어낸다. 카메라가 정지되어 있어도 프레임을 웬만해선 벗어나지 않는 승려와, 프레임을 재빠르게 벗어나는 자동차나 홍콩 시민들의 속도 차이는 인상적인 대비를 만든다. 영화는 승려의 속도에 맞추면서 결과적으로 익숙해있던 도회적인 풍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승려의 걸음이 도달하는 곳이 '먹는 것'라는 단순한 행위인데 그 과정을 27분이라는 짧지만 동시에 길게 느껴지는 런닝타임 안에 가득 채움으로서 우리의 삶에서 스쳐지나 가는 '시공간'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보게 만든다.

 

<행자>는 차이밍량 감독의 실험영화이다. 행위 예술의 피사체를 설정하고 세계를 환기시킴으로서 현재 우리의 삶의 모습마저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속도로 살아가고 있는가? 차이밍량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클로즈업 쇼트를 보여주며 승려와 동조하고 자신만의 느린 속도를 고집한다. 현대 세계와 동떨어질 수는 있더라도 각자 자신만의 삶의 속도를 고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영화는 역설한다. 그렇게 영화는 세계와 삶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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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S 컷과송  
<행자> 시리즈에 대한 일반적인 평문과 궤를 같이 하셨습니다. 부산영화제에서 관람한 <서유>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평고도 비슷하네요. 이제 다시는 차이밍량이 <청소년 나타>의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떠돌이 개>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