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평

페데리코 펠리니 1 - 청춘군상//백인 추장//비텔로니//길

10 컷과송 0 119 0 0

아래 글은 2010년 6월에 작성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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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까지 그를 14번 만날 수 있었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1920년 출생하여 1993년에 사망했다.

 

 

거장이라 불리는 감독에게 다가갈 준비가 내겐 부족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게으른 내겐 변함없이 거장들은 부담스럽다.

영화라는 문자를 넘어선 시청각 매체를 예술의 경지로 올린 이들에게

그저 서사라는 측면으로만 다가서는 앙상한 독자는 수척해진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작품을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감독 3인 연작인 "죽음의 영혼" 중 그의 단편을 슬그머니 TV에서 만났던 기억이 전부다.

아버님께서도 기억하시는 유명한 "길"조차 몇몇 장면만 스쳐갔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풍월삼아 펠리니적이라는 수사를 늘어놓는 가식을 떨어왔는데,

이때 펠리니적이라는 단어는 주로 서커스라는 심상과 연결된다.

 

 

펠리니 자신이 영화감독이 아니면 단장이 되었을 것이라 말한 바 있는 서커스는

표면적으로 그의 초기 영화들 속에 등장하는 유랑 극단의 배우, 사진소설의 주인공까지 어우른 광대를 뜻한다.

자신의 성장 배경과 관련되어 있을 가난한 지방 순회 공연단은

2차 대전 이후 폐허가 된 이탈리아 대중의 심리 속으로 서글픈 자아로 다가온다.

 

펠리니의 남자들은 대개 끝에 가서야 반성하는 바람둥이("카사노바", "여성의 도시" 등)이고

펠리니의 여자들은 그런 남자들을 정신 차리게하거나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는 순정인이다.

물론, 그런 둘 사이를 조정하는 영토는 대개 서커스와 영화, 즉 무대 예술을 품고 있다.

 

불과 10년전에 파시즘이 창궐했던 국가 이탈리아의 과거 정체성을 여기에 대입한다면

우스개같은  정치극으로 번짐도 흥미로울 수 있지만,

단 한번도 펠리니 자신이 극을 정치적인 좌표 위로 올려놓으려 한 적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 속 남성들의 자궁회귀 혹은 순환을 파시즘과 어떻게 연관시킬가는 제법 의미심장한 논제다.

언제나 성장하지 못하고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주체못하는 남자들과 인내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라면

차라리 유행하는 정신분석학의 언어들이 먼저 떠올려지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줄이자.

 

 

초기 펠리니는 무엇보다 정서의 감독이다.

그의 카메라는 세심하지도 용의주도하지도 않고,

니노 로타의 음악들은 심금을 울리기 위해 먼저 치고나기보다 뒷울음을 기다리며

편집과 미장센이 도두라지거나, 사려깊은 이론들의 기호학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선배인 로셀리니나 후배인 파졸리니의 가라앉은 분노와 격한 신화학 혹은 정치극도 아니다.

 

 

결국 펠리니의 영화들은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 대개 길에서 흩뿌려지는

조금은 낡아빠진 신파 방황극 속에서 서커스라는 무기를 들고나와

자신이 돌아갈 바를 갈구하는 남자들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그들을 선도해야할 여자들의 임무 수행이 반복되고

가난과 번민과 불안을 무대 위로 올려 탄생하지 못할 명작을 기다리는

삼류 연출자의 추락하는 심리와 그것을 완충하는 반동의 완결을 지향한다.

  

 

유랑 극단, 영화 그리고 축제라는 공간은

전시되는 에너지의 발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자의 위치를 의식하게 되는데,

펠리니는 이들의 무대 뒤 사연으로 눈귀를 열지만

같은 시기 할리우드의 동류들이 치열하게 출세 암투와 그 뒤안길을 오가는 것과 다르게

앞선 네오 리얼리즘을 따라 카메라를 두면서도 관찰하기보다 내면으로 들어가 손을 맞잡는 쪽을 택한다.

그의 초기작들에서 인물들은 돌아돌아 원래의 자리로 귀환하거나 앞모를 출발을 내딛지만,

언제나 그 곁에 지치지않거나 속깊게 다시 그를 불러줄 사람을 배치한다.

 

 

초기 펠리니에게서 펠리니적이라는 의미는 인생론적으로는 복귀의 굴곡이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전후 폐허 아래로 떨어진 이탈리아 대중들에 대한  따뜻한 끌어안기이다.

이 지점에서 극중 여성들의 역할은 줄리에타 마시나의 모성애적 장치로 대표된다.

  

초기 4편의 영화를 먼저 나누어서 소개드린다.   

 

 

1.  청춘군상 - 다양한 불빛 Luci Del Varieta(1950) : 소실점 너머로 터벅터벅 지친 광대들이 간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데뷔작은 유랑 극단의 이야기이다.

같은 해 할리우드에서 올려진 조셉 멘케비츠의 "이브의 모든 것"과 유사한 얼개

시골 출신 여성이 쇼 무대에서 성공한다는 곁가지를 유지하지만.

극의 정수는 빈털털이 극단 배우들의 기차 여정이라는 시작과 끝에서 드러나듯이,

난감하게 황홀한 일류 무대가 아닌 3류 극단의 그들을 통해서 이탈리아 민중들에게

야유와 동정을 불러일으키며 한편으로는 동질감으로 종결짓는 데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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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속 두번째 여성이 줄리에타 마시나의 29살 모습이다.

영화는 이후 반복되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서커스의 전형을 곧바로 드러낸다.

줄리에타 마시나를 모성적 여인으로 

그녀의 애인인(옆자리 콧수염 가수 겸 극연출가) 남성을 바람둥이로 설정한 후

다시 이들이 불안하지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여로 속에 유랑 극단의 부침이 동행한다.

 

 

이들 극단을 말 한마리가 끄는 마차에 한거번에 태우거나

젊고 매끈한 여성의 스트립쇼에 가까운 공연에 호황을 누르는 그들의 포스터가 비에 젖어 날리며

더러운 부르조아의 저택으로 안내하여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담고 

결국 내침을 당한 단원들을 가로수 소실점 너머로 터벅터벅 걷게하거나 쓰러지게 하고

비루하게 쇼비지니스의 거물들에게 굽신거리며

노숙자 예술가들과 교류시키고 그들과의 새로운 극단을 꿈꿀 때

펠리니의 진심은 버려졌지만, 다시 새로운 공연 기차를 탈 때 확인할 수 있다.

  

 

"청춘군상"은 펠리니적이라는 말의 서두에 유랑 극단의 설움을 오려붙이고

다시 돌아가야할 이탈리아의 모성에로의 가난한 민중 로드 무비다.

  

 

2. 백인 추장  Lo Sceicco Bianco(1952) :  아내는 왜 제자리로 돌아와야하는가

 

사진을 연속적으로 붙이고 이야기로 뼈대를 삼은 사진 소설이라는 대중 문화 장르에 대해서는 깊게 알지 못하지만,

영화는 사진 소설 속 주인공인 이방인 백인 추장의 배역에 매료된 젊은 신부와

그녀를 로마 친척들 그리고 교황에게 보여주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신랑의 신혼 여행 한 판을 그리고 있다.

 

 

사진 소설의 제작 방식에서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펠리니가 극중 백인 추장의 유치한 스타성으로부터 할리우드 무성 영화 스타에의 혐오를 추측하긴 이르다.

어디까지나 영화는 시골에서 도시로 신혼 여행을 온 부부의 진정어린 결합을 위해 달린다는 점을 잊지말자.

 

한바탕 로맨틱 코메디로 나설 정도는 아니더라도

"백인 추장"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염려와 사랑, 허황된 대중 우상에 대한 껍질 벗기기의 외피를 두르고

결국 이탈리아 사회의 봉합이라는 사회 완결된 구조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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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를 쭈욱 벌리고 멀찍이 높은 곳에서 그네를 타고 첫 등장하는 백인 추장 역의 배우를

황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신부의 지점은 곧 로마에서(남편에게서) 멀어졌다는 각성으로 대체된다.

 

전편의 유랑 극단에 이어 살펴볼 자취는 사진 소설의 제작진보다는

줄리에타 마시나가 단역으로 출연해 피폐한 신랑을 위로하는 밤거리의 불쇼 볼거리가 가깝다.

감독은 축 쳐진 어깨를 돌볼 공연에 일류적 솜씨와 기예를 부여하지 않고 머뭇거린다.

로마 교황에의 알현이라는 최종 도착점이 제시될 때 영화는 한편 계몽적이기까지 하다.

 

 

펠리니의 초기 영화 안에서 카톨릭 구교의 위치는 조롱이나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민중들 곁에서 행진하는 축제이거나 맞이해야할 대상으로 처음 제시되는데

이후 작품들에서 조금씩 드 위치는 변경된다.

 

 

펠리니의 두번째 작품인 "백인 추장"에서는 그의 타 작품에서와는 달리

여성/남성의 극내 성 역할이 교환되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남편은 아내를 탓하지 말고 기다리며, 아내는 방황하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온다.

그들이 처음 재회하는 곳은 정신 변동으로 추정되는 횡한 공간인데,

여기서 카메라는 그들이 바로 서로를 발견하기를 저어하고, 급작스런 포옹으로 가지도 않는다.

 

 

"백인 추장"은 서로에게 서먹한 아직은 사랑을 찾지 못한 신혼 부부의 로마 방문기이면서

한편으로 여전히 무대라는 공간에 대한 작은 애정을 감추지 않는다.  

   

 

3. 비텔로니 I Vitelloni(1953) : 떠나는 청춘을 배웅하는 소년의 이름은 귀도  

 

다섯 명의 사내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 무직자라는 것.

이들의 무료한 하루하루, 직장 없이 떠도는 시간들이 정확히 이탈리아 50년대 변두리의 심정을 대변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지방 인어아가씨 선발대회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끝내 비로 수상자가 제대로 소감을 말하지못하고

더 나아가 수상자인 아름다운 여인은 임신 상태로 현기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한다.

물론, 재빨리 영화는 이들 불안한 젊은 커플의 분열을 염려하여 장년층을 동원하여 결혼식을 올리지만,

그것이 극 전체를 지배하는 얼쩡거림의 분위기를 엎어내지는 못한다.

 

 

원제 "비텔로니"의 뜻을 굳이 풀이하자면 백수들 정도 되겠는데,

영화는 제목 그대로 5명의 남자들이 직업을 가지려는 시도조차도 보이지 않은채

가면 무도회와 극단 공연, 그들끼리의 의미없는 회합으로 일관한다.

 

 

위 두 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 유일하게 결혼한 남자는 여전히 바람둥이인데,

그가 왜 바람둥이로 배정되어야하는지 극 내부는 명확히 밝히지 않는데다가,

인어아가씨로 뽑힐만큼 아리따운 신부 또한 왜 그 남자만 고집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들 부부의 분열을 봉합하는 것은 결국 아기와 다시 등장하는 아버지 층들이다.

여기서 아버지-장년층은 인생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등장하는 데 반해 어머니들은 부재하거나 삐딱하다.

펠리니의 초창기 영화 속에서 이런 세대/가족 관계의 구성은 처음 등장하고 흥미롭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당시 이탈리아 사회상과 관련지어 해석할 부문이라 벽이 두텁다.

전술한 젊은 남성 5인의 막연한 나날을 이데올로기로 어떻게 풀어갈까 막연해지면서

다만 하나의 청춘 장르 속 성장의 두려움 관습에 가볍게 잡히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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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백인 추장"에 이어서 두번째 등장하는 바닷가는 이후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공간적으로 바다는 어떤 해소나 회귀의 장소라기보다 다만 위안이자 회한의 이미지로 사용되어진다.

신혼여행을 떠난 친구를 제외한 4인의 남자가 바다를 바라볼 때 카메라는

그들에게서 쉽게 답답함이나 막연함을 끌어내려하지 않고, 해답이나 고민 자체도 제시하기를 거부한다.

다만 그들은 장소의 이동 속 한 지점으로 마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의 공포처럼 바다에서 자신의 난감함을 발견하는 듯 하다.

 

 

5인 중 유일하게 결혼을 하고 취업도 한 사내가 일하는 직장은 카톨릭 장식품을 판매하는 상점인데,

그가 해고당한 후 절도한 천사상을 팔기 위해 수녀원과 수사의 집들을 방문하는 시퀀스에서

카톨릭은 그들 도둑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마치 그들의 의중을 꿰뚤어보는 듯 내친다.

초창기 펠리니 영화 속 카톨릭은 여기서는 젊은 이들의 무력한 의지를 낮게 타이르는 데서 그친다.

 

 

한바탕 가족 회복이 끝났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다른 가족이 분열된다.

그리고 다섯 남자 중 유일하게 한 사내만이 변두리 고향을 떠나는 기차에 오를 용기를 지닌다.

그를 배웅나가는 어린 소년 승무원 보조의 이름은  "8과 1/2"의 영화감독 이름과 같은 '귀도'이다.

카메라는 떠나는 그와 그의 친구들이 잠자는 방 안을 교차상영시키며 청춘 장르의 익숙한 불안한 이탈로 종결된다.

 

 

"비텔로니"는 펠리니가 바라본 50년대초 이탈리아 젊음에 대한 깊지 않은 리얼리즘 초상이지만,

어떠한 대안이나 분석도 마련되지 않은 채 던져진 답답한 바닷가의 산책 같은 영화다.

  

 

4. 길  La Strada(1954) : 가슴을 부풀리고 이불 빨래를 젖히고 인어공주를 맞이하자.

 

물론, 누구나 알고 있다. 백치미의 과잉이 윤리를 쉽게 불러드리라는 추정은 지나친 낙관이라는 것을.

줄리에타 마시나가 연극에 가까운 연기로서 지나침이 앞서는 가슴 시린 눈망울을 보이는 동안

그것을 정작 진짜배기 가슴으로 덮어서 사슬을 몇 번이나 끊어야했던 안소니 퀸의 무심한 짐승 연기가

어쩌면 극 전반을 보고 내게 꽂히는 진심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전작에서 선발된 인어공주는 그대로 오토바이 트럭에 새겨져 줄리에타 마시나의 길을 직역하고,

여전히 카톨릭은 그녀를 가장 신비로운 순수녀로 인도하거나 수녀로까지 승격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남자는 이제 아예 짐승이라는 말로 불리워지고, 진실된 마음의 남자는 목숨 건 외줄타기의 명수이다.

 

 

드디어 펠리니의 영화에 유랑극단이 아닌 순회 삼류 서커스가 등장한다.

서커스를 비롯 펠리니가 사모했던 장터 공연에는 세가지 흥행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다.

 

우선 주목할 하나는 이동이다.

한동안 나돌았다가 요즘은 좀 잠잠해진 유목민의 원형은 집시일테지만,

서커스나 극단도 천막과 극장을 찾아 정처없이 각 동네의 시장터를 찾아 움직이는 집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거부정이 최근 잘나가던 유목민의 주목할만한 차세대 주체로서의 그것과는

하루살이 정서나 빈털털이 주머니 사정에서 다르겠지만,

어쨌든 서커스-유랑극단은 가난한 지방하층민의 유일한 스펙터클이었다.

마치 지금의 인도 천막 영화관들이 순회할 때 환호성 지르는 관객들처럼 말이다.

 

 

두번째는 비실용성이다.

극단의 가수나 연주자, 서커스의 곡예사들의 노래, 연주, 기예들은 그 자체로는 상업적이지 않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할 때, 다시 말하자면 모자 속으로 던져주는 동전의 주인들이 있을 때

비로소 비실용성에서 하나의 전문적인 기술로 인정받는다.

까칠하고 가난하지만, 하나의 예술의 지류로서 인정받을만하고 거기서 장인 정신이 나온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먹고사니즘의 외연으로 나아가보는 좁지만 별스러운 문화 경험의 하나이다.

즉, 그들은,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 모두는 가난하지만, 서로를 문화를 통해서 돕는다.

 

 

세번째는 계급으로서의 몸이다.

유랑 극단에서 뚱뚱한 몸매에 다리를 치켜올리는 그녀들과 저급한 눈속임에 의지한 재빠른 손놀림의 마술사

허공에서 안전매트없이 외줄 타는 기예와 더불어 "길"의 안소니 퀸(잠파노)는 허파의 힘을 빌린다.

하다못해 줄리에타 마시나(젤소미나)조차도 나팔과 북을 치는데, 이는 모두 육체 노동이다.

보는 사람들이나 보여주는 사람들이나 모두 손과 발을 평생 놀려야하는 몸의 계급자들이다.

보는 자들은 보여주는 자들이 실패하지 않을까 즉, 떨어지지 않을까? 쇠줄을 못끊지 않을까를 염려하면서

스스로 내일의 밥줄을 염려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잠시 내려놓는다.

서커스의 곡예와 유랑 극단의 무대 마당은 바로 그 사이를 파고든다.

부르조아들이 서커스나 유랑 극단를 보지 않는 이유는 재미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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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모두가 알다시피 2인조 장터 서커스단인 잠파노-젤소미나가 달리는 오토바이에 대한 기록이다.

대개의 로드 무비에서 중요한 것은 길을 가는 이유로서의 속성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머물러야하는 장소들과의 관계이다. 

 

하지만, 영화 "길"에서 떠나야하는 이유나 길이 접혀져야하는 이유 모두가 이미 말뚝에 매여 정해져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시작한 길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끝맺을 때 

술꾼인 안소니 퀸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하얀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죽음을 전해주는 아낙네가 널고 있는 이불 빨래의 하얀색감처럼 순수의 굴레로 작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짐승같은 안소니 퀸이 키작고 통통한 백치 줄리에타 마시나를 오토바이에 태울 때

모두가 가졌던 성적 긴장감이 금새 '강간과 그짓'  사이를 오가도 별달리 이을 표정을 잊어버린 관객마냥

"길"은 펠리니의 앞선 전작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성적 관계의 직접적인 대사로서의 암시를 시도함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카톨릭적 윤리관을 가진 천사-성처녀가 폭력적인 마초를 죽음으로 돌본다는 이야기임을

극의 마무리까지 가지 않아도 젤소미나가 나팔로 갑자기 그녀의 테마를 불렀을 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순수농도 100 %에 가까운 처연하기 그지없는 신파극 자체를 서커스라는 낡은 유물로 들고나온

페데리코 펠리니가 자신하는 바는 카메라나 편집, 미장센 등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실제 아내인 줄리에타 마시나의 연극 무대같은 과잉된 연기가 실린 인물 하나에 있다.

그녀는 지극히 인내하고 마지막 순간에서 윤리를 설법하는 성처녀이고, 결국 죽음으로 승화되는 존재이다.

이건 철저히 캐릭터의 영화이고, 그 캐릭터가 진한 광대 화장을 하고 나왔을 때 완성되는 작품이다.

 

 

무언가, 아쉬운 분들이 계시리라 믿는다.

하지만, 영화는 곧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페데리코 펠리니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초창기를 지나서 여성의 성적 섹슈얼리티를 내세워 다시 머저리 남성들을 잠에서 깨운다.

조금 더 기다려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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