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평

하워드 혹스 7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S 컷과송 0 55 0 0

아래 글은 2011년 6월에 작성한 것을 그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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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까지 그를 14번 만날 수 있었다.

​하워드 혹스는 1896년 5월에 출생하여 1977년 12월에 사망했다.

영화사가 인정한 희대의 결작에 대해서 뭐라 반론이나 옆구리 찌르기를 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다만 그저 이 시퀀스에서 잠시 고개가 꺄웃거려 이해 불가능할 때 대체 뭘까를 물을 뿐이다.

이는 인상 비평의 대가들이 보여주는 높은 차원의 그것과는 다른 그저 그런 가벼운 호기심일 뿐이다.

걸작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적극적으로 당시의 사회상(50년대의 초기냉전, 매카시즘)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지금 여기 도착한 영화들에서 나는 그들과 다른 망상을 뻔뻔하게도 내세우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하워드 혹스의 50년대는 지난 시기 미국의 영광이 히로시마 이후에 심정적으로 조금이나마 사멸된 이후

조금씩 그 자세를 낮추어 그들(남성)들의 연대라는 나사가 조금 풀려버렸고

혹스는 여전히 여성이라는 그 몽키 스패너로 헐거워진 부위를 조이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스크루볼 코메디가 단지 합창과 율동으로 바뀌었을 뿐

이제는 확연해진 자본이라는 힘 앞에 한갓 포위된 위무의 멜로디 이상이 되지 못한다.

 

아래 두 편의 걸작을 하나로 묶어 짧게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예우이겠지만,

내게 하워드 혹스의 50년대는 다른 어떤 미사어구나 영화문법 보다

"자본"에 포위된 남성들의 나약한 반항이라는 표제로 곧바로 들어선다.

 

모든 알려진 영화작가들의 세계는 으례히 그렇듯 하나의 단정된 이데올로기로 간편히 제단하는 그 순간,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와 반대편의 의지를 공고히하는 반역의 환타지를 구가하는데,

이는 존 포드나 알프레드 히치콕에게서 보듯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하워드 혹스는 보수적인 개신교 이데올로기를 국가 이념으로 포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남성 동성애에 대한 은밀한 노출을 감추지 않았고,

여성 인물의 당당함을 긍정하면서도 그녀들을 여전히 독립적이지 못한 남성의 대상으로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거의 반자본주의적인 적이 없었고, 건장한 남성전문가들의 죽음이 담긴 성공에 대해 노골적으로 상찬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천진한 마초에 대해서 솔깃한 비아냥도 담아 항시 할리우드의 봉합이 불안함을 인정했다.

 

아래 두 편은 이전 그의 작품에서 언제나 뒷배경으로 물러나서 극 전반을 은밀하게 지배하던

전술했다시피 자본=금전이라는 극강한 권력 앞에 선 보잘 것 없는 남(여)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를 그리스 비극식으로 독해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내게는 이제서야 자본이라는 거울 앞에 서 자신을 분리시킨 유아의 첫 탈각으로 읽힌다.

설마, 하워드 혹스는 이제서야 할리우드 내부의 연출가로서 자신의 자리를 재고한 것일까?

 

 

9.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Gentlemen Prefer Blondes (1953) : 자본주의, 드디어 자신의 육체를 얻다.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별점을 남기려 인터넷으로 들어가니

연예 기사란에 마릴린 먼로의 드래스가 50억에 팔렸다는 해외 가십이 올라와있다.

어쩌면, 내가 본편을 보고 하고싶은 말의 전부는 저 기사에 이미 다 들어있으니,

그만큼 나의 관점은 초라하고 구시대적이라고 할밖에 없다.

 

혹스의 세계에서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개인적으로 처음이다.

그의 전작을 다 만날 수 없는 상황이니 어떤 다른 작품에서 여성이 전면에 내세워진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결정적이게도 여기에는 배우가 아닌 전全 시대적 인물인 "M.M 마릴린 먼로"가 등장한다.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1953년이라는 해에 마릴린 먼로가 이미 소개한 혹스의

"몽키 비즈니스(1952)"에서의 조연에서 당당히 주연으로 3편의 영화를 상재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헨리 해서웨이의 "나이아가라", 진 네글레스코의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과 본편이 그것이다.

 

그 해 그녀는 이전의 선배들이 긴 스커트 자락이나 담배 물기, 권총 들기 등으로 겨우겨우 숨기며

내뿜었던 팜므 파탈-기껏해야 영화 내 남성의 비극을 유도하는 경과물로서-의 정체성을

'몬로 워크' 한 방으로 영화 내 인물이나 제한된 사회가 아닌 자본주의 자체에 내뿜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는 드디어 이전의 남근 위협물로서의 여성이라는 자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기꺼이 냉전이라는 시대를 녹여줄 거대한 금강석같은 여성의 육체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대체시킨 것이다.

 

본편에서 등장하는 남성인물들은 배역의 구체성을 떠나서 이미 "풀려버린" 존재로 기록된다.

본격적인 뮤지컬이라고 하기에는 좀 모자란 그저 두 여배우의 노래와 율동의 미약한 혼성체인 영화는

이미 작정하고 미국 혹은 영국 남성들의 붕괴에 대해서 성적인 전략을 동원해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전히 자본주의 내에서 가장 훌륭한 아이콘이자 상품이며 반역의 근거지인

마릴린 먼로의 귀여움과 백치미, 풍만한 몸매와 적극적인 도발성 그리고 남성 폄하가 도사리고 있다.

이 정도라면 기꺼이 제목을 바꿔서 읽을 필요가 있겠다, "금발은 부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혹스는 제목을 굳이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라는 어쩡쩡한 표현으로 남겨놓았는데,

제목을 극중 그대로 대입시킬 때 과연 '신사'라는 존재는 누구에게 지정되어야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여기서 신사는 결국 자본가라는 말로 전환시킬 수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같은 간단한 자본주의 풍자극이라는 도식을 혹스 역시 모를 리 없음에도 그는 굳이 '신사'라 명명한 것은

반역적으로 이미 모든 신사=진정한 남성주의=일하는 전문가들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극 중 어느 남성도 제대로 된 생산성 있는 일을 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간 혹스의 세계에서 번득이던 무수한 남성 전문가 집단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대답은 우문과 더불어 존재하는데, 그들은 이미 자본 뒤편으로 사라져 그들의 긍지를 겨우겨우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전시대적인 여성, 마릴린 먼로의 몸이다. 그녀는 숨기지 않고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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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타이틀에는 제인 러셀의 이름이 마릴린 먼로보다 위에 올려져있지만, 

영화는 오직 마릴린 먼로만을 위해서 제작된 것인냥 도입부 공연 시퀀스에서부터

제인 러셀은 단지 6살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마릴린 먼로의 후면으로 배치되는 기미가 역력하다.

마릴린 먼로의 상반신이 클로즈업 되는 동안 제인 러셀은 아예 화면 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후반 법정 시퀀스에서 재론되겠지만, 이같은 제인 러셀의 제한된 위치는 실상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다.

영화 내 성격적으로 제인 러셀은 돈보다는 이성, 감정이라는 측면을 더욱 강조하고

그것은 마릴린 먼로의 배금주의와는 완연히 다른 길을 걷는다.

그럼에도 그녀 두 사람은 영화 속 대사처럼 "불가능한 친구"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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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n't There Anyone Here For Love?"

올림픽 남성선수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지그펠드 폴리스를 연상시키는 유명한 장면에서

그녀는 검은 의상을 입고 운동 기구를 들고 이곳저곳의 훈련장을 돌아다니며 노래하는 데

이 시퀀스에서 그녀의 율동은 지극히 에너지가 넘치며 남성 엑스트라의 육체와 잘 융화된다.

이 조합은 섹시한 여성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의 숨겨진 발기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남성 육체의 찬미라는 차원보다는 본편에서 유일하게 남성 전문가의 유령이 떠올려지는

올림픽 선수들의 집단 몸짓은 그들의 순수성을 제인 러셀을 편입시킴으로서 돋보이게 된다.

여기서 극 중에서 마릴린 먼로가 선수 중 최고에도 내뱉는 대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잘난 분이세요. 아무 말 마세요"라고 부드럽게 번역될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마릴린 먼로는 잘나빠진 남성들의 전문가 주의에 대해서 바로 조롱해주고 있다.

 

혹스는 본편에서 두 개의 줄다리기를 하기를 멈추지 않지만,

시소 게임으로 전환한다면 그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무게를 숨기지 않는다.

제인 러셀은 기꺼이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마릴린 먼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두 사람 중 누구의 키스가 좀 더 진실한 것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겠지만,

혹스가 부끄럽게도 마릴린 먼로가 호구로 삼은 남자의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을 커팅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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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Loves Goes Wrong"

파리 야외 카페의 이 장면은 영화의 형식적인 면모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영화의 조악한 내러티브는 이것이 코메디임을 그대로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삶의 아이러니의 강조보다는 초라함과 현란함 냉온탕을 오가는 무분별한 과시욕에 사로잡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제인 러셀은 순간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구경꾼이자 박수 부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본편의 솔직한 고백으로 마릴린 먼로가 같은 해 출연한 영화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이 왜 탄생했는지 알 수 있다.

그녀들은 상충되는 서로의 인생관에 대해서 토론하기보다는 권유하는 편을 택하는데,

그것은 혹스의 세계에서 남성 전문가주의가 결국은 관철되는 경향의 기이한 반대편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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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그리고 결정적인 답안은 유명한 먼로의 노래와 공연 무대에서 확실히 제시된다.

적어도 마릴린 먼로는 죽음에 대한 음모론 여부를 차지하고 모든 세상을 품 안에 넣은 최초의 여인으로 기록된다.

왜냐면 그녀는 전 시대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엔터테인먼트 영화 비지니스를 통해서

자신을 자본주의 그 자체와 동일시해도 좋다는 인증을 동시대 모두에게 각인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먼로가 연기 변신을 위해서 여러 장르에 출연했지만, 언제나 먼로는 그녀 안에서 나올 수 없었다.

대중은 언제나 그녀가 자본주의의 벌거벗은 표상으로 구별 지워지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영화사 초기 셜리 템플이나 릴리안 거쉬의 제한된 성 역할과도 비견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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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장소의 이동이라는 측면을 먼저 짚어야겠다.

오직 남성들의 논쟁만이 허락된 듯한 법정이라는 공간 안에서 제인 러셀은 같은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자신의 흑발이 아닌 금발로 포장하고 있고 그 모습으로 사립탐정을 변화시킨다.

 

법정이라는 공간과 저 노래 사이의 모순된 정립은

혹스가 이제 남성 전문가 집단에 대해서 거의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들게하는데,

여기서 제인 러셀의 율동이 거의 남성적인 것임을 상기한다면 그것은 거의 조롱이 되기도 한다.

마릴린 먼로가 단순히 무대 위에서 노래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파괴력을 지닌다는 측면에서

영화의 후반부에서 갑자기 제인 러셀은 자신의 정체성을 커밍 아웃함으로서 주인공이 된 듯 하다.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먼로이지만, 정작 해결자는 러셀이다.

하지만, 제인 러셀은 이전의 혹스 세계의 그녀들처럼 가볍게 편입되기 이전에

법정 내 모든 남성들에게 일종의 선언과 과시를 전함으로서 남성들이 스스로 해결하게 만드는 해결을 이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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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해결되었고, 할리우드는 안전하게 봉합되었으며 그녀들은 행복한 결혼으로 종결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누구에게로부터 연유되었는가를 물으며 동시에 그것이 춤과 노래의 환타지 마취가 아닌지도 묻자.

마릴린 먼로에게서 비롯되었던 기존의 연애 윤리 파괴는 전혀 보수적으로 되돌려지지 않았고

극 중 어느 남성도 감히 그녀, 마릴린 먼로에게 대적할 수 없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도

제인 러셀이 사립 탐정과 사랑이 담긴 결혼을 했기 때문에 해피 엔딩이라고 믿지 않았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언해피한 해피 엔딩의 혹스적인 반복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혹스의 세계에서 전에 없었던 완전한 이탈이며

그것은 마릴린 먼로라는 20세기적 인물로 인해서 다소 과하게 뒷받침되고 있다.

 

제인 러셀이 남성이라고 전술한 것은 그녀가 생물한적인 남성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캐릭터가 최소한의 남성 동성 사회의 긍지에 대한 기존의 예찬이라는 부분을 점한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다시 한번 제인 러셀이 극 내내 마릴린 먼로에게 주연의 자리를 내준 것은 의도적인 연출이 된다.

극 내부의 형식 자체가 지나치게 헐거운 면이 보이는 것도 내부의 주제와 정확히 조응된다.

비록 거대한 유람선이지만,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서 그것은 조악한 미니어처의 초라함을 벗어날 수 없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는 혹스의 남성주의가 자본에게 짓밟히는 시간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계단에서

마릴린 먼로라는 거대한 육체 앞에 기꺼이 무릎 꿇고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금전 앞에 선 발기 불능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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