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평

하워드 혹스 3 -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요크 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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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2011년 6월에 쓴 것을 그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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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까지 그를 14번 만날 수 있었다.

​하워드 혹스는 1896년 5월에 출생하여 1977년 12월에 사망했다.

 

 

3.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  His Girl Friday (1940)

  : "시민 케인"이 등장하기 1년전, 신문사에는 대사와 편집만큼이나 전문가들이 참 많다.

 

 

제목의 "프라이데이"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스크루볼 코메디의 전형을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정말 이 단어를 사용해야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왜 내 글에는 '하지만'이라는 표현이 많은지도 더불어),

나는 오로지 오직 한 장면에만 집중하고 싶다.

누군가 창 밖으로 몸을 던졌고, 그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다음에 기자 패거리들은 말했다.

"저 봐 움직였어"라고, 그리고 그들은 무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철저하게 거의 세트 스튜디오 촬영에 의존한(그나마 길거리 스튜디오마저도 한 컷뿐이다.)

장르의 오래된 고전은 의외로 원작보다 더 언론에 대한 풍자극으로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럼에도 이것은 하나의 위태로운 줄타기의 첫번째 선례가 될 것이다.

하워드 혹스는 그가 정확히 어떤 곡예술로 관객을 흡입할 것인지

그리고 그가 감추어두려하는 지점이 언제 살짝 개봉되어도 좋을 것인지를 인지하면서 흥행과 비난의 외줄을 걷는다.

 

영화는 분명 원작에서는 달리 남성을 여성으로 만들어 로맨스를 과시하고

이들 사이에서 몇 단계를 과감하게 뛰어넘는 대사의 전쟁으로 이 장르의 어떤 정점을 이룩해낸다.

연달아 하워드 혹스에게 3번 간택된 캐리 그란트와 로사린드 러셀 두 남녀 주인공은 그들이 출연한

어떤 영화에서보다 많은 대사들을 암기하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데 지치지 않았을까 싶다.

 

화염 방사기와 다를 바 없는 두 배우의 입놀림에도 불구하고 본편의 정점은 정적에 있다.

그 정적은 영화 속에서 본편이 정말 스크루볼 코메디가 맞는가싶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침묵과 함께 찾아온다.

그리고 거기에 하워드 혹스는 이 영화가 존재하여야할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언론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모두가 죽음을 방관하고 유희한다는 혹스적 세계에의 재생과 잇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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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남자, 한 명의 여자, 세 명의 인물을 프레임 내부에 배치하는 방식은 혹스의 카메라에서 흔히 보인다.

그는 그들 사이에 전혀 갈등이 보이지 않을듯한 인물들을 굳이 첫 화면에서 같이 배열하면서

떠나야할 여인을 남성 패거리 안으로 정착시키고 그들의 전문성에 대한 예찬으로 몰아넣는 효과를 노린다.

전작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의 신문사판이라고 해도 좋을 반증으로서 도입부 시퀀스는 존재한다.

 

위 장면에서 로사린드 러셀의 의상 중 주목할 것은 당연히 모자이고 확연히 남근을 상징하는데,

이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역할의 랄프 벨라미가 우산을 별도로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할만하다.

여기에 캐리 그란트는 개인 사무실에서 전기 면도기로 수염을 깎는 장면의 등뒤 모습으로 등장함으로서

그가 하나의 언론사를 책임질만큼 남성 전문가의 면모를 지님을 단출하게 제시한다.

 

그보다 더 주목해야할 남자는 캐리 그란트에게서 불법적이고 껄끄러운 사기성 업무를 담당하는 남자 루이일 것이다.

후반부에 루이는 사고를 당한 후 찢어진 옷을 입고 캐리 그란트에게 와서 그의 명령에 게이적인 본성을 숨기지 않는다.

캐리 그란트가 정말 자기를 좋아하는지 확인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혹스적 남성집단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혹스는 남성 동성애 집단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는 로사린드 러셀이 원작에서 남성이었음을 기억한다면 확연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결국 새로운 특종이 터질 장소로 신혼여행지를 포기하듯 말한다.

물론, 더더욱 중요한 것은 캐리 그란트가 그의 신사다운 풍모에도 불구하고

로사린드 러셀이 들고있는 커다란 짐가방을 결코 자신이 들고 문을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영화 제목이 " His Girl Friday"인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한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

( 아시다시피 '프라이데이'는 로빈슨 크루소의 이름없는 원주민 하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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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인 영화의 첫 장면이 드디어 도착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분명 캐리 그란트와 로사린드 러셀이지만,

그들은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가장 핵심적인 인물도 아니다.

 

본편에서 가장 돌출된 특이한 인물은 그간 하워드 혹스의 영화 속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던 캐릭터로

혹스적 세계의 후기에 가서 뚜렷이 보이는 남성 전문가 동성 집단의 파열음을 상징하는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단 한명의 여성 '몰리'가 바로 본편에서 유일하게 주목할만한 얼굴이다.

 

그녀의 신경질적인 얼굴은 도대체 그녀의 얼굴 뒤에 어떤 영혼이 숨겨져있는지 알 수 조차 없을만치

단지 누군가를 휴머니즘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에 대한 울부짖음의 표상이다.

위 장면은 몰리-그녀가 만들어내는 영화의 첫번째 이탈이자 연극적인 풍경이 된다.

 

몰리-그녀가 기자들에게 한바탕 온 몸을 동원해서 휘젓고 나간 이후

확대 과장 왜곡이라는 삼박자 보도에 익숙한 기자 패거리들은(혹스는 이들을 전문가 집단이라 보지 않는다)

갑자기 한순간 자신들의 내면으로 찰나적으로 들어가는 정적의 단락을 만들어낸다.

스크루볼 코메디라는 장르와는 어울리지 않는 집단 성찰의 시간이야말로 혹스의 외줄 노림수이다.

하워드 혹스는 이들에게 과연 자긍심이나 도전의식이 있는지 묻고 그들을 카드 게임에서 해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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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양육"에서 등장했던 정신분석의가 다시 등장한다.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에서도 정신과는 아니지만 의사가 일장 연설을 통해 주제를 제시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의사, 살인자가 정신질환인지를 진단하는 생명이 달린 판단을 내리는 정신과의사가

하워드 혹스의 스크루볼 코메디에서 세번 연달아 출연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장치가 된다.

 

위 시퀀스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과 의사가 살인범에게 진단을 하기 위해서

커다란 조명등을 대상자의 얼굴에 비추는 것에서 필름이 커팅된다는 것이다.

명백히 영화와 관객에 대한 은유임이 틀림없는 숏은 이후 살인범이 진단 상황을 이용 탈옥했음을 알린다.

게다가 살인범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사형 연기라는 선고를 받는다.

즉, 영화라는 장치가 살인을 무마시키고 정신 착락으로 진단하며 그로 하여금 외부로 이탈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하워드 혹스의 죽음에 대한 조롱 그리고 영화라는 장치에 대한 자기 선언이 다시금 도출되는 지점이다.

 

좀 더 덧붙이지면 로사린드 러셀이 살인범을 만나서 묻는 질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느닷없이 총의 용도를 그에게 묻고 그에게서 어떻게 사형을 피해나갈 것인지 힌트를 준다.

( 그것이 정말 살인범에게 하나의 시사였는지, 관객에게 던지는 실마리였는지는 중요치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총'일 수도 있고 '용도'일수도 있다.

이것 역시 하나의 양방향적인 혹스의 노림수인데,

'총'은 즉각적으로 남근을 상징하며 로사린드 러셀으로부터 새롭게 남근 각성을 한 그가 제거될 수 없음을,

'용도"는 영화 내부의 언론에 대해서 기사의 본질적이고 정의로운 용도에 대해서 가볍게 질의하는 형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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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린드 러셀이 본편에서 유일하게 스튜디오 내부 사무실 세트가 아닌 길거리 세트에서

그야말로 거의 액션을 방불케하는 날렵한 몸날림으로 중년 남성을 잡는 것은 희극적이다.

물론, 그 희극은 그가 대머리이고 로사린드 러셀의 몇 달러에 매수되는 관료임을 보여줌으로서

더 이상 그가 남성 집단 내부에 존속할 수 없는 거세된 존재임을 드러낼 때 묘한 쾌감을 준다.

여기서 로사린드 러셀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나올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여자가 거세된 남자를 상대할 때는 무기조차 불필요하다고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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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장면의 도착은 이미 언급되었다.

살인범이자 몰리-그녀가 보호해주려했던 남자가 언론-데스크-책상 안에 숨어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상대방 기자 패거리들을 향해 비난을 섞어 마지막 유언처럼 말을 하고

창 밖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져 길거리로 추락한다.

이 장면은 위 기자실의 정적과는 달리 금새 관객의 곁에서 떠나고 만다.

거기에는 캐리 그란트의 기자실 입성이 단단히 한몫을 한다.

 

아마도 감독은 좀 더 진하게 그녀의 죽음을 잘근잘근 씹음으로서 죽음에 대한 언론의 가치를 물음으로서

1940년대 남성 전문가 집단이 딛고 서 있는 사후 세계를 지적하고 싶었겠지만,

장르의 속성은 즉각적으로 다시 그들만의 리그가 상당히 견고함을 언해피한 해피 엔딩으로 은폐시킨다.

어쨌든 지배하는 이들은 남성 집단이고 여성은 편입되거나 희생되거나 어느 순간 결정하여야하는 위치에 빠진다.

로사린드 러셀은 기자실에 남아있지만, 그녀의 실상은 거기 길 위에 죽은 듯 쓰려저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편은 하나의 맥락에 속할 두 여인 혹은 하나의 젠더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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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로 돌아가자. 하워드 혹스의 편집술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전화기 커팅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전화기 자체를 별도의 변수화를 통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상황 도구로 상승시키는 것은 혹스의 손놀림이다.

전화를 받는 자가 이 상황에서는 승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초반부 시퀀스의 가벼운 조롱을 되살릴 필요가 있겠다.

편집장은 그들 언론사가 민주당 전통 지지자임을 말하지만,

캐리 그란트 사주는 가볍게 공화당 주지사를 설득시키기 위해 거짓 전술을 지시한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본편의 양방향 외줄타기, 스크루볼 코메디와 사회 풍자의 양면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남성 동성 집단의 탄탄함과 불안성 어느 쪽으로든 흔들릴 준비가 되어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마지막 질문, 나는 아직도 세 명의 여인들이 왜 남자 주인공을 사랑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이것은 성정치학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로맨스라는 측면에서 묻는 것이다.

캐서린 헵번과 진 아서와 로사린드 러셀은 왜 캐리 그란트라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가?

어쩌면 여기서 하워드 혹스의 30년대말 세계는 시작해야할 것이다.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는 여성은 어떻게 남성에게 종속되어야하는가에 대한 이상한 엘로우 페이퍼이며

두 개의 정적으로 처음으로 남성 집단의 긍지에 대한 질문을 미약하게 던지기 시작하는 재혼 보고서이다.

 

 

 

4. 요크 상사 Sergeant York(1941) :  작품은 첫번째 찬송가가 울릴때까지, 다음은 카프라의 세계로 전환

 

song님의 게리 쿠퍼에 대한 단평으로 글을 시작해야겠다.

"그는 어딘가 멀뚱해보여"

 

게리 쿠퍼의 스타성은 그의 말년인 50년대 출연한 서부극 "하이눈", "베라크루즈", "서부의 사나이"을 제외한다면

잘생긴 장신 미남이라는 표식말고 유일하게 언급될 수 있는 이미지로서 어리숙한 보일듯말듯한 미소로 정리된다.

누구보다 더 프랭크 카프라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제임스 스튜어트와 더불어 게리 쿠퍼는

"디즈씨 도시로 가다"와 "존 도우를 찾아서"를 통해서 그의 장점을 할리우드의 미국 서민 신화에 새겨넣었다.

그리고, 하워드 혹스는 프랭크 카프라의 "존 도우를 찾아서"와 같은 해 게리 쿠퍼를 이중으로 이용한다.

 

결과는 표면적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게리 쿠퍼 개인적으로는 아카데미의 첫번째 남우주연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얻었고,

하워드 혹스는 유일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선정이라는 경사(?)가 겹쳤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전시 홍보영화 "가장 아름답게"와 쌍벽을 겨룰만한

2차 세계 대전과 서민의 성공 신화라는 할리우드의 미라클 스토리에 가당찮은 한 점을 더한 것으로

이전의 어떤 작품보다더 혹스적 세계관의 구축에는 실패한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대해서는 그리 길게 쓰고 싶지 않다.

비록 할리우드의 미국 신화만들기를 간단하게 치부하고 싶은 마음은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세계가 해피한 언해피엔딩이라 거부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리 쉽게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의 겉포장을 따지고 들자면 좀 더 깊은 영화 이론에의 탐닉이 아직 없는 나로서는

프랭크 카프라의 세계와 과연 어디가 다른지 명백히 선을 긋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1차 세계대전의 실제 영웅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면서 하워드 혹스는 자신의 인장을 새겨넣기는 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전쟁-서민 히어로 무비라는 장르 안에서 제대로 살아 숨쉬지 못하고 단편적인 기표로만 남는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환의 기점에서 그는 너무 계시의 이미지에만 매달려 주제를 풀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그 중요한 기점이 바로 죽음-살인이라는 궁극의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서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2시간 14분이라는 긴 상영시간동안 몰려오는 졸음을 겨우겨우 참아내고 추출한 혹스적 세계들의 표식들은

영화 전반을 감싸는 종교적 가부장제와 서민 영웅의 가족관, 보상받는 선의의 선택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아래 간단히 소개하는 장면들에 대해서 더 이상의 부연을 하지 못함은 내 모자란 소견탓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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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오프닝이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예배당에서 시작되고

처음으로 제대로 조명되는 인물이 흰머리 가득한 목사 남성일 때 이미 본편의 세계는 예상된다.

변두리 농촌 마을 거기서 울려퍼지는 찬송가는 이 세상이 살만한 것임을 선언한다.

 

하지만, 여기서 하워드 혹스는 쉽사리 이에 동의하지 않는 제스처를 보인다.

예배당에서 처음 나오는 노래의 제목을 정확히 쓸 수는 없지만,

노래의 내용을 축약하자면 창조주 앞에서 기꺼이 죽음을 맞을 수 있다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여기서 방점은 창조주가 아니라 '죽음'에 찍혀져야 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이 이 찬송가를 부르는 동안은 어떤 인물이나 외부음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이 노래가 극 전반을 받치는 하나의 주제를 집약한다는 뜻도 된다.

즉, 모든 인간들은 기꺼이 죽을만한 존재라는 혹스적 세계의 조롱식 노랫말인 것이다.

 

이를 보충하는 이어지는 판토마임적 시퀀스에 주목한다면

한 늙은 남성 신자가 목사의 설교 이후에 들어와 마루를 삐걱되면서 걷는데,

이는 조용히 해야하는 공간에서 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전시함으로서

그야말로 죽음이라는 살얼음판이 어디서나 존재함을 은유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주인공 게리 쿠퍼의 술취한 총소리 난동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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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난동이 끝나고 게리 쿠퍼가 그의 동료들과 술을 마시러 온 공간에서 주시할 것은

술집 중앙에 선연히 보이는 주 경계선일 것이다.

게리 쿠퍼는 그 경계선을 넘어서야만 술을 마실 수 있는데,

이는 극 내부에서의 앞으로의 그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과 삶이라는 동전의 양면에 대한 시소 게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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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구입하기 위해 사격 게임에 나간 게리 쿠퍼는 칠면조의 머리를 맞춰야한다.

(물론, 1940년대 영화이니 박살난 칠면조 머리를 보여주지는 않으니 안심하시라)

여기서 게리 쿠퍼는 뛰어난 명사수라는 전문가 남성이라는 범주이 혹스적 세계에 한 발을 들여놓는다.

 

과녁으로 제시되는 칠면조 머리는 나무 아래로 숨었다가 게리 쿠퍼의 새울음소리에 위로 올려지는데,

이는 위 장면의 술집 내 주 경계선과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의 희극적인 조롱 이항대립의 기호를 둔탁하게 보여준다.

문제는 이 장면이 후반부 전쟁 장면에서 독일군을 표적으로 하는 사격술로 다시 반복된다는 슬픈 지점에 있겠다.

후반부 전쟁 장면에서 독일군은 과녁이거나 신사이거나 명청이에 불과한 가련한 존재다.

( 물론 1940년대 전시하 할리우드 공장품에서 이 이상을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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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신의 계시를 혹스적으로 해석해보자.

'자! 내가 너에게 번개를 내리노니 살인을 버리고 삶의 시간으로 돌아가거라"

말도 사람도 다치지 않고 오직 게리 쿠퍼의 장총만 구부러진 비과학적인 시간은

아주 희박한 죽음에 대한 혹스의 전쟁 홍보 공장품에 대한 감상적 타협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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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으로 마지못해(그는 극중에서 종교적 양심거부자로 제시된다) 나아간 게리 쿠퍼는

현명한 지휘관(그는 시골 마을의 목사와도 같은 존재이다.)의 책과 성경을 들고 바위 턱에 앉는다.

그의 곁에는 고향집에서 키울 것 같은 개 한 마리가 같이 자리한다.

 

제시되어야할 해제, 즉 관객에게 우리의 시골 영웅 명사수가 전쟁에서 살인을 해도 좋을 이유를 만듦에서

하워드 혹스는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음을 단지 게리 쿠퍼를 응시하는 감상적인 카메라를 도출함으로서 웅변한다.

나는 이 장면의 자극적인 낭만이야말로 혹스가 공장품 내부에서 존재하면서 이탈하려는 의지로 읽었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고 단지 시간이 흘렀다고 해야옳을 숏에서 게리 쿠퍼는 드디어 살인으로부터 무장해제된다.

즉, 그는 단지 주변 동료의 죽음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더 이상 죽으면 안되겠다라는 마음으로

인간이 아닌 기관단총의 조종자들(그들은 독일군이다)을 그야말로 일망타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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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로 던지는 게리 쿠퍼의 스타성을 입증하는 song님이 말하는 멀뚱한 얼굴을 덧붙인다.

기실 영화는 이미 위 시퀀스에서 끝이 났고 이후의 전쟁 장면과 포상, 그리고 귀향은 모두 사족에 불과하다.

프랭크 카프라가 명백히 연상되는 시골 영웅의 선한 결단-자본으로 보상받지 않고 가족을 찾는-은

결국 이미 마련되어 있는 행복한 해피 엔딩의 하우스라는 공간으로 충분히 봉합되어진다.

 

스크루볼 코메디의 왠지 불안한 해피엔딩의 시간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가족애와 죽음을 완전히 넘어선 이상한 살인의 정당화만 남을 때 영화는

그야말로 "요크 상사" 즉 게리 쿠퍼라는 배우의 아름다운 마흔이라는 시간만으로 요약된다.

 

 

"요크 상사"는 드문드문 보이는 죽음에의 천착과 삶이라는 희극에 대한 조롱만으로는 여실히 부족한

서민 전쟁 영웅이라는 장르 안에서 제대로 헤어나오지 못한 혹스의 아쉬운 공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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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4 절멸  
저도 봐야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10 컷과송  
이런 구닥다리 글을 읽어주시다니 송구함이 앞서는군요..이 게시판에 새롭게 등장하신 님의 장문의 영화글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