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라라랜드(La La Land, 2016)

영화감상평

[리뷰] 라라랜드(La La Land, 2016)

28 율Elsa 3 2843 0

 

고전 할리우드의 계보를 이으면서 모든 감정에 화룡정점을 찍는, 뮤지컬 장르의 또다른 정점.

평점 ★★★★★

 

제목 <라라랜드>(La La Land)의 의미는 사전적으로 비현실적인 세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TV, 영화 산업과 연관지어 남부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를 지칭하기도 하는 말이다.

 

영화의 주된 배경은 LA의 할리우드다. 결국엔 할리우드라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다룬다고 선포하는 셈인데 그 판타지의 실체가 <라라랜드>가 내비치는 공간적 유희다. 실제적인 판타지(예를 들어 미아가 배우 지망생으로서 할리우드로 상경하게 되고 꿈을 이루고 성장하는 드라마)를 보여주기 보다는 다미엔 차젤은 정서에 집중한다. 본 영화에서 공간은 허구의 판타지를 구현하기 위한 무대로서 활용도가 높다. 그리고 그 자체의 정서 중심의 판타지로 영화는 강렬하게 각인된다.

 

<라라랜드>의 오프닝 시퀀스를 예로 들자. 오프닝 시퀀스는 여러 의미로 강렬하다. 스토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퀀스이지만 처음으로 관객을 압도하게 되는 일종의 스펙터클이다. 내용은 차가 꽉 막힌 도로에서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는 장면인데 장면이 열리고 닫힐 때까지 시선을 잡아끄는 요소가 즐비한다. 처음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재즈 음악, 리듬에 슬슬 몸을 들썩이다 보면 엑스트라들이 등장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엑스트라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뒤로 계속 엑스트라들이 추가되면서 행위 예술(?)의 범위가 커지다 보면 동작의 경쾌함에 매료되고 동선이 점차 이어지는 것에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동작과 안무, 리듬과 동선을 카메라가 한 씬 원 테이크로 담아냄으로서 축제 같은 판타지를 더욱 탄력 있게 만들어낸다.

 

다미엔 차젤은 장면의 연속성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오프닝 시퀀스가 동떨어져 보이든, 그 이후의 모든 판타지적인 장면들이 연계성을 못 지녔든 상관이 없다. 오로지 '순간'이다. 다미엔 자첼은 오로지 순간순간마다의 정서에 집중하고 음악의 직관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인다. 뮤지컬 장르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점인 것은 맞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영화가 음악의 직관만큼 이미지에도 정서를 끊임없이 담아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걸 '미장센'이라고 부른다.

 

<라라랜드>는 미장센의 영화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보편적인 뮤지컬 또는 음악 영화들이 놓친 지점(특히 시각적인)들을 다미엔 차젤은 빼곡하게 시네마스코프의 프레임에 담아낸다. 그래서 영화 자체의 프레이밍의 밀도는 꽤 높은 편이다. 하지만 그런 시각적 장치들이 오색찬란한 동화같은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특히 대표적으로 진 켈리 감독의 <사랑은 비를 타고>(1952)와 같은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감과 세트, 분장, 소품, 의상 등 미술적인 요소들에 있어서 두드러지는 감각적인 디자인은 고전 할리우드 장르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도 보인다.(시네마스코프 화면도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쓰인 비율이다.) 신기한 것은 그것들이 전혀 촌스럽지 않고, 더 나아가 아기자기한 판타지로서 향수의 정취마저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카사블랑카>(1942)나 제임스 딘 주연의 <이유 없는 반항>(1955)와 같은 고전 영화를 영화 내에 끌어들이고 드러냄으로서 고전에 대한 헌사를 직접적으로 내비치기도 한다. 그렇게 영화는 고전의 향기로 하여금 판타지의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스토리도 매우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로맨스 장르에 따른 기존 할리우드 영화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데, 쉽게 말하면 클리셰다. 너무 정직하게 따르고 있어서 장르로서 싱겁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이런 클리셰가 되려 장점으로 작용한다. 뮤지컬 영화에서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할 수 밖에 없다. 노래와 가사 안에 복잡다단한 플롯을 촘촘하게 구성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 많은 뮤지컬들이 음악의 직관을 활용한다. 그 전에 먼저 클리셰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장르는 그 자체로서 중립성을 띈다. 애초에 클리셰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 애초에 그렇지도 않다. 단지 장르 영화는 연출자가 표현해내는 감정의 깊이에 따라 평가받는다. 일단, <라라랜드>는 장르의 공식을 가져옴으로서 음악의 직관을 활용한다. 그 사이에는 장르 영화를 보는 관객의 편안함(관객이 스토리를 예상하고 영화가 그 예상에 점차 들어맞음으로서 관객이 느끼는 편안함)이 있다. 관객은 이미 장르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본 영화는 로맨스 영화의 기본적 정서에다가 뮤지컬 장르를 가미하여 '순간순간'의 정서를 연이어 극대화한다. 그러니까, 이런 장르를 답습하는 단순함으로 인해서 아이러니하게 판타지의 정서는 더욱 깊어진다는 말이다. 

 

또한 뮤지컬 장르이다 보이까 사운드와 움직임에 대해서 얘기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운드는 음악이다. 음악은 직관적인 예술이다. 음악을 듣기만 하면 곧바로 음악 고유의 정서가 무의식 속에 각인된다. 곧 음악은 정서를 다루는 예술인데 한 음악에 고정적으로 정서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음악도 어떤 악기도 연주하냐에 따라서 정서가 바뀌기도 한다. <라라랜드>에선 이러한 유연성이 돋보인다. 단순한 선율의 테마 음악이지만 주인공의 상황과 심정이 변화됨에 따라 악기나 연주 방식이 바뀌면서 정서도 유연해진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판타지로서의 음악과 현실로서의 음악이 대비된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의 판타지의 낭만과 흥겨움, 그리고 현실의 척박함과 힘겨움이 자연스럽게 대비되고 간극을 이루고 있는데(특히 엔딩 시퀀스에서 노골적으로 판타지 장면을 삽입함으로서 정서의 간극을 더욱 벌린다) 이런 정서의 대비도 마찬가지로 '순간'을 극대화한다.

 

<라라랜드>에선 하이라이트마다 음악에 가사가 부재한다. 가사가 있다고 한들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대신 다미엔 차젤은 가사의 여백을 이미지로 가득채운다. 위에서 내가 <라라랜드>는 미장센의 영화라고 말했다. 사실 본 영화를 보면서 먼저 기억되는 것은 이미지다. 입체적인 형형색색의 판타지적 이미지가 중심을 단단하게 이루는 셈인데 정서를 설명하지 않고 있는 그 자체의 정서적 체험으로 남게 되며 관객은 온전히 정서에 동화되는 마법의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위의 지점에서 영화평론의 허무함을 느꼈다. 영화는 주관적인 예술이기 때문에 그 감상을 단어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관객들은 비유를 들거나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영화에 대한 평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관객의 감상은 언제까지나 추상적으로나 머물 뿐 단어를 통해서는 객관화되지는 못한다. 아무리 영화가 가지는 감정의 파동이 크더라도 영화평론은 관객의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라라랜드>는 정서를 다루면서 그로 인한 평론의 영역을 무효화시키기까지 한다. 체험의 영화 앞에서 '객관'은 의미가 없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움직임(Move)은 역시나 본 영화에서 큰 영역을 담당한다. 애초에 미장센이나 음악이 영화를 채우고 있다고 한들 화룡점정을 찍어주는 것이 바로 안무이다. <라라랜드>에서 보여지는 안무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것이지만 움직임을 빼곡하게 담아내는 유려한 카메라 워크는 정서에 역동성을 불어넣는다. 소품의 자잘한 활용도 유머로 승화되어 영화가 가지는 전체적인 역동(力動)은 더욱 커진다. 이 모든 것은 순간의 정서를 위해서다. 그 이상의 무거움은 담지 않는다.

 

여기서 <라라랜드>가 유흥거리로 끝나지 않게 되는 이유가 있다. 애초에 영화(Movie)는 움직임(Move)의 예술이다. 움직임이 없으면 영화도 없었다.(물론 영화사적 측면에서 볼때 오즈 야스지로와 같이 정지로 영화를 실험하는 감독도 존재하였긴 했지만, 할리우드에서 영화는 기본적으로 움직임의 예술로 인식된다.) <라라랜드>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본질을 질문한다고 볼 수 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감정에 무게를 실음으로서 프레임 내의 움직임은 무엇으로 승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다미엔 차젤 감독의 자문자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엔 <라라랜드>가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도 불릴 수 있는 이유다.

 

이러한 대답이 '구현'되는 데까지 감독 자신의 역경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미엔 차젤 감독은 정작 <위플래쉬>에서 세상을 향해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투사시켜 보였다. 하지만 <라라랜드>에선 사뭇 다른 자세다. <위플래쉬>의 열정이 현실에 적용될 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간접적으로 포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멜로 영화의 틀을 따서 두 주인공의 비극을 통해서 드러낸다. 과거의 예술을 향유하고 서로 공유하게 되면서 연인 사이까지 발전한 미아와 세바스찬이 각자 다른 현실적 고충과 선택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사이가 점차 멀어지게 되는데, 다미엔 차젤은 이 지점에서 현 청춘들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머무는 고민을 드러내보인다. (뮤지컬 장르도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여기서 감독의 자전적 고민이 유추된다. 포털 사이트에 적힌 영화 비하인드 스토리를 발췌하겠다.

 

인터뷰를 통해 다미엔 차젤레 감독은 “<라라랜드>는 <위플래쉬>보다 먼저 만들고 싶었던 영화”라고 밝힌 바 있다. 이미 2006년 각본을 완성했지만 당시 신인이었던 그가 원하는 대로 영화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고, 차선책으로 <위플래쉬>의 각본을 썼다. 절치부심으로 만든 이 작품의 흥행과 비평에서의 세계적인 성공에 힘입어 다미엔 차젤레 감독은 마침내 <라라랜드>를 세상에 내보일 수 있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 의도된 메시지 같지는 않다. 메시지는 부재되어 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경쾌하게 달콤하게 그리고 씁쓸하게 2시간을 즐겼으면 됐다. 위에서 계속 강조했듯이, 결국엔 정서이고, 영화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만들어진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라라랜드>는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 장르가 올라간, 또는 올라갈 수 있는 최고봉을 등반한 작품이다.

 

- 20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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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S 컷과송  
님의 격문을 읽으니 차츰 이 감독에 대한 염려랄까 그런 것이 생기는군요. 미학을 위한 미학, 전작에서 능히 흡혈귀-죽음 너머의 유체이탈을 선언하고서 도달했던 예술에의 자의식이 다시 도착한 듯 싶네요.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이에 더할 말은 부족하지만, 할리우드 고전 뮤지컬의 정점이자 움직임으로서의 영화 예술에의 복귀라면 도무지 거역할 수 없을 듯한 감상의 좌표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부정적이고 늘근 관객의 자리는 새삼 예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묻게됩니다. 서사를 버리고 말을, 이미지를 행했던 영화들의 범람 앞에서 본편은 움직임을 전면에 내세우는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34 진트  
이 글을 읽고나니  ..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되네요

추카추카 12 Lucky Point!

32 까치와엄지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재밌게 볼 수 있을 정도인가요?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