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자전거 탄 소년(Le gamin au vélo, 2011)

영화감상평

[리뷰] 자전거 탄 소년(Le gamin au vélo, 2011)

28 율Elsa 3 2064 0

 

'집'을 향한 힘찬 페달. 그것을 뒤따르는 다르덴 형제의 경이로운 뜀박질.

평점 ★★★★☆

 

'다르덴 형제'라는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와 같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에서 느껴지는 공동된 형식들. 다큐멘터리를 극영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자유로워 보이지만!) 아주 정교하게 짜여진 핸드헬드 기법의 동선은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 마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카메라는 캐릭터와 연결되기 시작된다. 피사체를 응시라는 카메라의 시선은 캐릭터에게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그렇다. 다르덴 영화의 힘의 진정한 원천은 바로 캐릭터다. 영화는 그 캐릭터를 응시하는 것 자체의 행위만으로 관객을 캐릭터 옆에 세워놓는다. 그리고 이미 그 자체로 관객은 캐릭터에 동화된다.

 

'기교 없음'의 기교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은 매우 잘 짜여진 '형식주의'의 영화라는 것을 증명한다. 다르덴 형제는 리허설을 철저하게 하고 인물의 감정선을 위해 장면들을 순서대로 찍는 방식은 유명하고 유명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는 명확하다. 감독과 캐릭터가 카메라를 매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바로 그 카메라의 위치에 관객이 서 있다.

 

지난 다르덴 형제의 작품들이 그래왔다. 언제나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즘을 비추려했다. 감독과 피사체의 관계에서 감독은 그저 응시자의 역할만을 수행했다. 피사체를 판단하는 것은 카메라의 위치에 동일하게 서 있는 관객이었고. 하지만 관객은 피사체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야기의 전개가 관객의 예상에 기대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르덴 형제는 관객에 대해서 피사체로의 접근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마치 관객과 피사체 사이의 관격, 스크린을 통해서밖에 서로를 볼 수 밖에 없는 두 주체는 분명하게 분리된다. 그 사이에서 다르덴 형제는 관객의 세계에도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피사체의 세계로도 접근하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는 어떻게 보면 중립적인 중재자로서 자신들의 영화 안에 서 있다.

 

여기서 '중립적인 중재자'라는 의미는 편향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아마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사회적인 휴머니즘의 일환으로 본 관객이라면 이런 반문이 있을 수 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피사체에게 시선을 집중함으로서 인간의 애환을 이끌어내는 영화"라고. 하지만 나는 의견이 좀 다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말그대로 '응시자'로서의 작품이었지, 거기에 공감하거나 몰입되는 것은 관객 개개인의 몫이다. 즉,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소극적이다. <로제타><아들><더 차일드>에서 보여왔듯이  사건은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부터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개인의 세계 안에서 맴돈다. 그리고 인물은 어떻게든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따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과정에 있어 다르덴 형제는 인물들을 구제하지 않는다. 마치 인물 스스로에게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듯한 냉정함을 보이는데 이 연출 혹은 각본에 있어선 휴머니즘은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응시자' 그 이상으로 뜻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한 비편향성은 '신'에게도 적용되었다. 위의 문단을 다시 말하자면 다르덴 형제는 관용으로서의 신의 개념을 배제한다. 회의주의로까지 보이기도 하는 이 지점은 다르덴 형제 영화들의 근간이었다. 굳이 신까지 끌어들어야 할 정도의 평인가 싶기도 할 수 있지만 내가 언급하는 이유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자전거 탄 소년>은 기존의 회의주의를 버리고 구원으로서의 신을 받아들인 영화다.

 

일단 이 영화의 형식적 측면에 대한 이야기는 그 동안 다르덴 형제에 대한 평론글에서 많이 유사하게 들어왔다. 일관된 형식과 철학은 이야기가 많이 되어왔지만 <자전거 탄 소년>은 그에 대한 변화가 눈에 띈다. 1인칭 시점에 더 가까웠던 기존에서 더 물러나 전지적 시점에 더 가까워진 곳에서 머물며 다르덴 형제는 자신들의 작품에 '신'으로서 개입하기 시작한다. 즉, <자전거 탄 소년>에서 감독은 관객과 시선이 합일된다고 할 수 있다.

 

다르덴 형제의 개입은 형식적 측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시점의 변화와 플롯의 활용도 연출에 있어 활용의 폭이 넓어지긴 했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음악의 활용이다. 음악을 활용한다는 것은 관객의 몰입을 직관적으로 자극한다는 뜻이다. 기존의 감독 작품들을 좋아했다면 가장 낯설기도 한 동시에 새롭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엔 프레임 외부의 사운드로 특유의 공간감과 사실감을 구축했다면 <자전거 탄 소년>은 그에 따라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 왜 갑자기 음악을 사용하였을까. 거창하게 질문하였어도 본 영화만으론 그 답을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다르덴 형제는 냉정함을 떠나서 소년의 어려움에 주목하고 반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응은 관객에게로 이어져 직관적으로 공감되기 시작하고 이는 소년에 대한 위로로 이어진다. 여기서 변화 첫번째: "시선의 변화". <자전거 탄 소년>은 그런 의미에서 다르덴 형제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피사체에 대해서 애정 어린 시선을 담고 있다.

 

'시릴'은 무책임한 어른으로부터 버림받은 소년이다. 시릴은 아버지를 끝내 추적하고 방황하지만 되려 주변 어른들은 시릴을 문제아로 삼는다. 그런 11살 소년의 절망 앞에서 우연히 '사만다'를 만난다. 사만다는 시릴의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아주게 되면서 시릴은 사만다에게 자신의 주말 위탁모가 되어주기를 부탁한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시작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만다라는 인물은 주변 인물들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사만다는 소년의 심정을 이해하고 주말 위탁모를 맡아주게 되면서 시릴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 구원해 준 한 명의 천사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사실, 다르덴 형제가 영화 내에 꼭 담아내고 싶었던 인간상이 아니었을까. 또는 사만다라는 캐릭터에 다르덴 형제가 자신들을 영화 내부에 투영시켜 시릴에게 직접 다가가는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시릴과 사만다가 하나의 프레임 안에 치환되는 그 순간부터 다르덴 형제는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시릴에게 구원이란 것은 진작에 없었다. 어른들의 무책임과 주변 일상의 폭력이 자신을 향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긴 11살의 무능력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두 발로 뛰거나 혹은 자전거를 타는 행위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자전거'는 무엇인가? 시릴은 아버지를 찾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전거를 찾기도 하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자전거'는 구원을 향한 시릴의 욕구가 내포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집'으로 상징된다. 이 영화에서 집이라는 공간은 세 곳이다. 첫째로 이사가버린 예전 아버지의 집, 둘째는 문제아 웨스의 집, 그리고 셋째는 사만다의 집이다. 그리고 각각의 집은 시릴의 욕구가 발현될 수 있는 지점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시릴에게는 그러한 지점이 없었다. 구원의 발현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버지에게로부터 버림받고 그 다음 발현점으로 어른에 대한 절망으로 인해 동네의 문제아들과 어울리지만 한번의 실수로 다시 버림받는다. 마치 극 중 시릴의 별명처럼, 시릴은 자전거를 찾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핏불(투견)'처럼 거칠게 구원에 대한 갈망을 비쳐왔다.

 

하지만 셋째의 집은 전자들과 다르다. 사만다는 시릴의 일탈적인 거침없는 모습에서도 끝내 시릴에 대한 구원의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 왜 그런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극 중 시릴과 사만다가 식사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시릴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한다. "왜 나를 받아주셨어요?". 하지만 사만다의 대답은 "몰라"로 응수한다. 다르덴 형제는 사만다의 행동에 이성적인 답변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만다, 혹은 다르덴 형제의 대답은 이런 의미로도 들린다. "그래야 해야 하니까". 이는 인간의 본능으로서 도덕성을 믿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구원에 대한 질문의 해답은 여기서 나오는데, 영화는 구원의 본질은 인간 스스로가 가진 인간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변화 두번째: "관념의 변화". <자전거 탄 소년>은 인간에 대한 희망의 시선을 담고 있다.

 

시릴은 결국 사만다에게로 돌아온다. 이는 성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이는 시릴에게 돌아온 일상의 폭력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일어난 깨우침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사만다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시릴을 관용의 자세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위로한다. 시릴과 사만다가 같이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질주하는 장면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 중에서 가장 속도감 있고 희망찬 장면인데 욕망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발현된 시릴의 해방감을 나타낸 장면이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는 소년에게 해방감을 선사했더라도 구속의 족쇄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시릴이 강도를 저지렀던 신문 배달원 부자(父子)는 소년을 향한 문제아적인 낙인과 폭력이 사회적인 관념으로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시릴이 사과를 하고 배달원의 아버지는 법적으로 시릴과 화해를 했더라도 여전히 시릴에 대한 분노는 이성에 억눌러진 채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시릴이 배달원 아들에게 쫓겨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시릴은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저질렀던 일탈 행위의 처벌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의외인 부분이다. 시릴은 분노하지 않음으로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된다. 여기서 신기한 것은 그 과정에 사만다는 없었다. 그 족쇄를 풀어준 것은 사만다가 아니었다. 사만다는 조력자였을 뿐이었다. 다르덴 형제는 그 마음의 족쇄를 푸는 것은 캐릭터 스스로에게 맡겨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냉정함의 자세가 아니라 시릴을 위해 선사한 시련의 고통처럼 보인다. 다르덴 형제는 우연으로 위장하면서 신의 관용으로서 개입한다. 여기서 마지막 세번째 변화 : "행동의 변화". 그리고 시련 뒤에 참 평화가 오는 것처럼, 시릴은 그렇게 한층 더 가볍게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소년은 집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영화는 소년을 향해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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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S 컷과송  
다르덴 형제의 세계를 응시자와 신의 개입으로 이분화한 글 잘 읽었습니다. 다들 본편에서 왜 감독이 기존의 연출법에 변화를 주었는지 궁금해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지요.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주변 상황으로 인해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고,...아니면 이제 시간이 점점 없다고 판단했거나 더 이상 세상의 끝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맑스적 의지가 들어섰을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이 작품의 엔딩은 여전히 매섭다는 생각입니다. 소년의 자전거가 직진하고 그것을 카메라가 지켜보지 않고 왜 좌회전을 하여 건물 뒤로 사라지며 카메라는 그것을 지켜보거나 따라가지 못한 것인지가 섬뜩합니다. 전작 <로나의 침묵>의 엔딩과 비교한다면 이 차이는 더욱 크게 다가오지요. 이에 대해 감독은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확정적으로 응답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너무 선명한 것이 아니었나 싶은 우려가 들었습니다.
28 율Elsa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엔딩 시퀀스에서 시릴이 나아가는 길 앞에 무엇이 있든지 다르덴 형제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카메라가 시릴을 따라가지 않고 멈추게 되는 것은 시릴의 미래에 대한 연민보다는 능동적이고 행동을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카메라는 건물로 하여금 시릴로부터 스스로 분리됨으로서 시릴의 주체성을 응원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로제타><아들><더 차일드>의 엔딩 시퀀스에선 카메라는 피사체로부터 멀어지거나 분리되지 않으면서 냉정함을 취하지만, <자전거 탄 소년><내일을 위한 시간>에선 엔딩 시퀀스에서 카메라가 스스로 피사체와 멀어지면서 휴머니즘을 직접적으로 불어넣고 있다는, 제 개인적 의견입니다. 여기서 아마 간격의 변화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추카추카 34 Lucky Point!

S 컷과송  
아...그같은 시선도 가능하겠습니다. 하나의 카메라에 대한 다른 시선에서 이 영화가 다르덴 세계에서 가지는 변곡점을 감안한다면 님의 시선이 더 타당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