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역(2016)

영화감상평

[리뷰] 서울역(2016)

28 율Elsa 6 1844 0

 

돌아갈 곳 없는 자들의 <부산행>을 향한 지옥도.

평점 ★★★★

 

 

이 영화를 본격적으로 얘기할 때에는 먼저 <서울역>의 시퀄인 <부산행>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좀비를 내세운 블록버스터로서 이례적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부산행>은 올 여름을 강타한 오락영화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KTX라는 공간에 서로 단절되고 구분지으려는 대한민국 사회의 군상을 은유하기도 하였으며 재난이 닥쳐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을 때의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드러내보이려는 사회과학적인 상징도 보이기도 했다. 오락적으로나 주제적으로나 자연스럽게 결합된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그렇다면 서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부산행>과 <서울역>을 특징적으로 굳이 비교하자면 <부산행>은 오락에 치중하여 관객을 더 우선시한 면이 있는 반면에, <서울역>은 연상호 감독의 작가적 야심이 더욱 두드러지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두 작품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작품들이다. <부산행>을 본 관객들이 <서울역>을 보고 실망을 거듭한 이유도 아마 서로 다른 형식적 특징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 작품은 거의 별개로 작품으로 보는 것이 더 현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상호 감독도 "<부산행>은 오락영화이고 <서울역>은 무거운 영화"고 언급하며 선을 긋기도 했다. 

 

위에서 <서울역>이 <부산행>의 '프리퀄'이 아니라 <부산행>이 <서울역>의 '시퀄'이라고 언급했다. '프리퀄'과 '시퀄', 공통분모로 속편을 뜻하지만 의미는 명확하게 구분된다. 전자의 뜻은 <부산행>이 먼저 제작되고 다음 편으로서 <서울역>이 차후 제작되었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서울역>이 먼저 제작되고 <부산행>이 뒤이어 제작되었다는 의미다. 국내에선 <부산행>이 먼저 개봉하여 <서울역>이 프리퀄로 홍보되었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사실 <서울역>이 먼저 기획 단계에 있을 때 배급사 N.E.W.에서 <서울역>을 극영화로 리메이크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연상호 감독은 <서울역>이후의 이야기를 이어서 제작하자고 반대로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게 <부산행>이다. 애초에 <서울역>이 없었다면 <부산행>은 없었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연상호 감독도 언급한 대목이기도 하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서울역>을 뿌리, <부산행>을 나무줄기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두 작품을 구분짓기도 하였지만 같은 세계관과 같은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작품 사이에 연결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대다수의 관객들이 연상호 감독을 <부산행>으로 이번에 처음 만나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독립영화계에서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감독이다. 그건 한국의 시네필이라면 이미 습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상호 감독은 극영화 감독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더 익숙하다. 그래서 연상호 감독이 극영화 <부산행> 연출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기대감과 동시에 의구심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극영화와 애니메이션 사이 장르의 대비되는 특징에서 오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극영화 연출을 맡게 된 것도 연상호 감독 작품들의 특징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연상호 감독의 작품 속에는 "연상호 감독답다"고 할 수 있을 법한 그의 인장이 명확하게 새겨져있다.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사이비>를 거쳐 이번 <서울역>으로 완성되는 3부작은 연상호 감독의 작품 세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연상호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판타지의 대상으로서 다루지 않는다. 연상호 감독의 그려내고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회'다. 그것을 보여주고 이야기하는데 있어선 연상호 감독은 은유법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그의 화법은 직설적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배제당하는 인물들이 주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인물에 대한 연상호 감독의 시선도 극단적이다. <돼지의 왕>에선 과거의 학교폭력의 트라우마로 인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을 다루면서, 먹히기 위해 살육당할 수 밖에 없는 없는 가축 '돼지'라는 비유를 인물에게 불어넣었다. <사이비>에선 가정 폭력을 일삼는 가부작적인 인물을 내세우고 사이비 종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마을 주민 또는 집단을 바라보게 하면서 사회악의 순환을 응시했다. 연상호 감독은 그러한 사회라는 이름의 집단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며 희망적이지도 않다. 결국 악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하는 인간들은 점점 더 깊은 트라우마로 빠지게 되는데 바로 그곳이 연상호 감독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다.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 내면의 심해를 들어가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문제시하는 것이 연상호 감독 작품들의 주축을 이룬다. 지독한 회의주의와 염세주의로 요약되는 세계는 <서울역>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런 면에서 <부산행>은 예외다. 마지막 장면에선 인간에 대한 희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것이 연상호의 현재 본심인지는 관객이 판단해야 할 몫이다.)


<서울역>의 주요 테마는 바로 좀비다. 왜 하필 좀비일까? 어떻게 보면 좀비라는 것 자체가 회의주의적이다.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선 좀비가 매카시즘에 대한 정치적인 은유로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인간에 대한 고찰을 안기기도 하는 괴생물체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존재가 죽어서 본능적이고 야생적인 '괴물'로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연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던져질 수 있는 요소는 충분하다. 인간의 삶의 끝에 도달하는 곳이 이성이 아니라 야생적인 본능이라면 이성은 참으로 덧없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좀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전염성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사회학적인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도시에서 좀비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계속 도망치는 사람들. 여타 좀비 영화가 이러한 공식을 따르고 있고 <서울역>에서 연상호 감독도 이 지점을 메인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서울역>에서 이 공식은 과연 재난 상황이 닥쳤을 때 인간의 이성은 사회에서 어떠한 군상으로 드러날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처음 들리는 대사는 두 청년의 대화로부터 비롯한다.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건 보편적 복지라니깐". 이 대사는 매우 강조된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끝나는 내내 '보편적 복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두 청년이 하고 있었던 대화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보편적 복지'라는 완전한 하나의 관용어로서 작동했던 의미는 두 청년의 언행의 불일치와 모순으로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번의 비웃음. 그렇다면 '선별적 복지'는 어떨까? 그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서울역>의 주인공들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사람들이다. 영화 안에서 보여지는 노숙자들을 보면 복지를 받고 있는가? 물론 영화에서 노숙자 쉼터가 보여지긴 한다. 하지만 그에 따른 관리 체계는 기계적이다. 노숙자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나뉘어져 있고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노숙인들은 다시 서울역으로 내쫓아진다. 경찰들도 노숙자들에 대해선 기계적이다. 마치 그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계급'. <서울역>에서 크게 주제적으로 의미를 관통하는 단어 중 하나다. 왜 좀비가 시작되는 첫 단계가 노숙자였을까? 아니, 왜 노인 노숙자는 무엇에게 목을 물려 피를 흘리고 있었을까? '그 무엇'. 영화에서 그 지점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 주체'가 아니라 '물려진 대상'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노인 노숙자는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관념의 원인은 보이지 않는 계급에 따른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복지의 부재로서 영화에서 드러나지만 이러한 사회적인 폭력은 결국 인간을 좀비로 변화시켜 야생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게 만든다. 결국엔 그러한 피폐적인 폭력은 회귀하여 전반적인 사회로까지 작용한다.

 

노숙자들은 집이 없다.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바깥에서 생활하는, 생활환경이 가장 안 좋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좀비로부터 가장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다. 국가적인 재난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피해를 보게 되는 계급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영화에서 노숙자들은 계속 움직인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안전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위협하는 것은 좀비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시스템도 그대로 작용된다. 좀비에게 쫓겨 경찰서 유치장에 같이 있게 된 경찰이 멀쩡한 노숙자들을 향해 좀비와 같은 괴물로 취급하며 총을 겨누는 장면은 사회적인 폭력의 방향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까지 개입하게 되는데 좀비로부터 생존하려는 사람들의 무리를 의경들이  총을 쏘면서 진압하는 장면은 계급을 통틀어 국가라는 시스템이 얼마나 둔감하고 어리석은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두번째 비웃음.


어떻게 말하면 극 중 인물들이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은 바로 '집'이다. 여기서 '집'이라는 것은 안락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자신이 재난으로부터 안전한 거처를 뜻하는 것이 옳다. 맨발로 서울역 주변을 누비면서 지친 혜선의 대사("집에 가고 싶어요")는 주제적으로 비교적 명확하다. 서울역 또는 여관으로부터 시작해서 지하도를 거쳐 모델하우스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집이라는 공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모델하우스는 집이라는 공간의 모형으로서 진짜처럼 보이지만 가짜인 공간이다. 집이라는 공간은 결국 혜선의 입장에서는 이상으로만 머문다. 결국에 사라진 것은 복지다. 영화는 그 복지가 계급에 기반한 사회적 폭력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각인시킨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인물들에 대해선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석규와 혜선, 기웅이 서로 만나게 되면서 희망은 사라지고 인물들은 더욱 큰 염세주의로 빠진다. <서울역>에선 인간에 대한 구원은 없다. 아니, 연상호 감독 작품들에는 절대적이고 관용적인 신이라는 존재를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있는 그대로 현실만 작용할 뿐이다. 인간에 대한 회의주의로 시작해서 더 나아가 사회에 대한 염세주의는 신이라는 '개념'을 비웃는다. 여기서 세번째 비웃음. <부산행>을 향했지만 전혀 다다르지 못한 인물들은 한 폭의 지옥도의 일부로서 그려진다. 그 지옥도는 거칠고 직설적이며 가감없다. <서울역>은 대한민국 사회의 끔찍한 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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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S 컷과송  
감독이 만족할만한 매우 정직한 리뷰입니다. 자주 휴가를 나오시는군요..
28 율Elsa  
큰 부분만 다루다보니깐 세세한 디테일을 놓쳐버렸는데;; 칭찬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난 주 외박 때 보았었는데 지금 옮겨적네요.
8 HANWHOONHG  
저도 이 영화 리뷰를 썼는데 저보다 더 세밀한 부분을 다루셨네요. 잘 보고 갑니다.
28 율Elsa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34 진트  
서울역 ..  네이버평점이 상당히 낮고  그외  리뷰들을 보아도  실망했다는 평이 많이 보입니다만

개인적으로    좋게 보았습니다

안좋은 반응의  대부분들은  그림체가 너무 후지다(?)  전문성우를  쓰지않아서  그런지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력이 딸린다    말하는것과 입모양이 안맞다  서울역의 혜선과  부산역의
시작부분  심은경 과의  연결이 안된다  등등 ..  주로  작품외적인  것들을  많이  비판하던데
그런부분들에서  어느정도  동감하는 바이기는 하나 ..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가 에  포커스를 맞춰서  감상해보라고  권하고 싶네요
28 율Elsa  
저는 그런 대중들의 지적이 제작 과정이나 연상호 감독의 의도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되는 지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연기나 입모양이 괜찮고 자연스러워 보여서 더 몰입을 하고 보았습니다)
그.래.도. 연상호 감독 작품 중에서 (<부산행>을 제외하면) 최고의 스코어라니 그렇게 문제시 되지는 않을 거라 보여집니다.
어차피 아직까지는 (보편적이면 좋겠지만) 속된 말로 아는 사람만 즐기는 독립영화이니까요.

추카추카 5 Lucky Po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