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지는 것과 다가오는 것의 불협화음 이중주

영화감상평

<다가오는 것들> : 사라지는 것과 다가오는 것의 불협화음 이중주

14 스눞 1 2632 0

 

e5fc5bfeadc2881f44fe86e67081a254_1473387592_8221.jpg

 

 

 '프랑스 영화는 어렵다'는 편견은 이번에도 깨지 못했다. 이해 못할 난해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도, 난폭한 상징과 자유로운 예술혼이 넘쳐나는 영화도 아니었지만, 영화 깊숙이 흐르는 프랑스인의 피(철학과 문학으로 중무장 한)는 어쩔 수 없었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겂 없는 신예 감독 미아 한센 러브(나는 그녀의 전작, <에덴:로스트 인 뮤직>을 흥미롭게 보았다)의 다섯 번째 영화 《다가오는 것들 (L’avenir, Things to Come, 2016)》은 철학서에서 인용한 구절들과, 아름답게 삽입된 노래들의 가사와, 그 위를 자연스레 춤추듯 수놓는 인물들의 서사가 어우러진 메타 텍스트로 읽어야 마땅하다. 젊은 감독이 찍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인생에의 관조와 성찰이 촘촘히 녹아있는 이 영화는 인상주의 화풍의 풍경화를 보듯 한 중년 여인의 내면 풍경을 그려 보인다.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다.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정신병을 앓는 홀어머니의 딸이다. 영화는 그녀의 인생 12년(그중에서도 엄마가 죽기 전후의 1년여를 집중적으로)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때로는 세밀화이자 때로는 원경의 풍경화처럼. 카메라는 인물이나 상황에 딱히 개입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 예를 들어 애제자 파비앵(로만 코린카)이 거주하는 리옹의 집단농장에 가는 나탈리의 장면 : 짐을 들고, 기차에 타고, 열차에서 내리고, 마중 나올 차를 기다리고, 차에 타고, 차가 달리고, 차에서 내리고, 가방을 옮기고,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 사이 눈이 내렸고, 내린 눈이 쌓인 농장의 풍경을 지문과 대화가 없는 연작 그림처럼 건조하게 묘사한다. 느린 듯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서사의 진행은 머리와 꼬리를 잘라내고 일상의 몸통만 보여주는 (그러나 튀지 않고) 물 흐르듯 한 편집과 함께 감정의 과잉을 막아 준다. 

 

 

 

 영화는 영화의 첫 장면에 보이는 학생들 시험지의 질문,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영화 속 인물들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반복적으로 묻는 과정이다. 그녀가 오랜 시간 철학적·일상적으로 견고하게 구축해왔던 세계가 하나씩 무너지며 영화는 앞으로 나아가고 깊어진다. 평생 사랑을 줄 거라고 믿었던 남편 하인츠(앙드레 마르콩)는 딴 여자가 생겼다며 떠나고, 아이들은 성장해서 제 가정을 꾸린다. 오랜 시간 자부심을 갖고 집필하던 철학 총서는 다른 교재로 대체되고, 끊임없이 애정과 관심을 요구하며 딸에게 집착하던 엄마 이베뜨(에디뜨 스꼽)마저 죽고 만다. 그녀 곁에 남은 것은 뚱뚱하고 늙은 엄마의 고양이 '판도라'뿐. 영화의 제목 '다가오는 것들'은 실상 '사라지는 것들'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삶을 채우거나 붙들고 함께 했던 것들이,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던 것들이 그녀를 남겨두고 떠난 후, 나탈리가 겪게 되는 헛헛하고 쓸쓸한 공허와 상실이 이 영화의 주된 풍경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상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탈리의 무너져가는 세계 앞에 평생을 함께 해온 철학은 속수무책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 상황 상황에 맞는 철학적 논제들-학생들의 학교 폐쇄와 농성 때는 신의 정치에 대한 루소의 <사회계약론> 한 구절을, 엄마의 장례식 때는 인생의 상실과 슬픔에 대한 <팡세>의 한 구절을 추모사로 읽는다-을 곱십으며 상실과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상상하는 것'을 통해 부재하는 것들을 대체하고 관능적 쾌락을 대신하기 위해 노력한다. 남편과의 이혼과 엄마와의 사별이 힘들겠다고 위로하는 젊은 제자 앞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실컷 누리고 있다고 담담하게 자위하지만, 생활의 자유와 지적 만족이 밀려오는 공허와 슬픔을 상쇄시켜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나탈리의 삶을 가장 크고 심하게 흔든 것은 믿었던 것들의 배신이다. 영원할 것 같던 젊음은 시든 육신이 되어 다가오고, 저명한 철학교수인 남편은 오랜 시간 외도를 하며 사랑을 믿었던 자신을 실망시킨다. 타인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정작 자기는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는 등 도덕적으로 타락한 남편의 위선은 쇼펜하우어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집착하는 장면을 통해 희화화된다. 게다가 마음 둘 곳을 기대하며 찾아간 애제자는 은사의 위선을 질타하고 조롱한다. 급진적 실천주의자인 제자 파비앵은 지행합일을 위해 평생 노력했다는 나탈리의 말을 반박한다. 나탈리의 노력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서만 이루어졌으며, 서류에 서명하고 파업에 동참하는 것으로 부르주아적인 자기 위안만 일삼았다고 비판한다. 그날, 나탈리가 마지막까지 굳건하다고 믿었던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고 상심한 나탈리는 고양이 판도라를 끌어안고 서럽게 운다.  

 

 

 

e5fc5bfeadc2881f44fe86e67081a254_1473387656_7181.jpg

 

 

 세상의 거침없는 변화 앞에서 나탈리는 두렵고 외롭다. 나탈리의 철학 교재가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리타분하다는 출판사 직원들의 지적과, 새로운 삶의 대안을 꿈꾸는 제자 파비앵과 젊은이들의 공동체 속에서 늙고 지친 철학 선생은 이방인의 비애를 느낀다.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낸다. 어쩔 수 없는 변화의 흐름 앞에서 나탈리는 자기가 믿었던 것들의 떠밀림에 혼란스럽다. 제자 파비앵은 레비나스와 지젝 심지어 테러리즘까지 지적 자양분으로 섭취하는데, 나탈리는 그런 제자의 급진성을 이해할 수 없어서 괴롭고 외롭다. 그녀는 '타인의 생명을 조금 더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가르침이 파비앵에게 전달됐다고 믿었지만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앞에서 그녀의 신념은 한갖 구시대의 유물로 비칠 뿐이다. 

 

 

 그래도 나탈리는 할머니(딸이 손녀를 낳는다)가 되고, 여전히 좋아하는 책을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기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녀는 '사라진 것들'과 고통스럽게 이별하고 자기 앞에 '다가오는 것들' 앞에 담담히 마주 서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을 뿐이다. 쎄라비- c'est la vie, 그것이 인생다.






-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철학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엄마가 키우던 늙고 뚱뚱한 고양이 '판도라'에 집착하는 나탈리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논리적이고 지적으로 보이는 나탈리가 실상 얼마나 인간적인지, 철학의 허상 속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가는 실체인지를 은유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 오랜 시간 사람 손에 길들여진 고양이 판도라가 파비앵의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숲 속으로 줄행랑을 치던 장면은 몹시 흥미로웠다. 야성이 있으니 걱정 말라는 파비앵의 낙관과 달리 나탈리는 늙고 살찐 집고양이 판도라가 결국 숲 속에서 죽게 될 거라 걱정하지만, 다음 날 돌아온 판도라는 천연덕스럽게 물고 온 들쥐를 나탈리의 신발 속에 내려놓는다. 야생의 승리, 자연의 순리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나탈리의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하다. 나탈리도 결국 집고양이 판도라처럼 새롭게 다가오는 변화 앞에 (쉽진 않았지만) 담담하게 적응해 나간다. 인간에게도 야성이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니까.

 

<에덴: 로스트 인 뮤직>에서도 느꼈지만,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의 음악과 영상을 결합시키는 감각은 탁월하다. 그중에서도 우디 거스리(밥 딜런의 멘토)의 'My Daddy (Flies a Ship in the Sky)'가 흐르는 리옹 시골에서의 드라이빙 장면은 정말 멋졌다. 도노반의 'Deep Peace', The Fleetwoods가 아카펠라로 바꿔 부르는'Unchained Melody', 남편과의 결혼생활 내내 지겹게 들었다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와 제랄드 피셔가 함께 녹음한 슈베르트 가곡 「물 위에서 노래함(Auf dem Wasser zu singen)」이 흐르던 장면 역시도.

 

 

* https://youtu.be/hg7E3IooZdM 

(Ship In The Sky - Woody Guthrie)

 

 

 

 

이자벨 위페르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를, 영화 초반 자다가 엄마 전화를 받고 일어나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는 장면을 보면서 다시 느꼈다. 그 집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사람의 것처럼 그녀의 몸동작은 거침이 없었다. 연신 감탄.

 

- 나탈리는 남편의 외도와 이혼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녀가 정작 못내 그리워하는 것은 남편 소유의 별장에서 함께 보낸 22년 간의 소중했던 추억이다. 공들여 가꾼 정원과 별장에서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그녀는 결국 눈물을 흘린다. 인간이 삶을 기억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 사르코지 대통령이 TV에 나오자 엄마 이베뜨는 딸에게 저게 누구냐고 묻는다. 너무 못생겼다면서. 시라크는 어땠냐고 나탈리가 묻자, 시라크가 차라리 낫다고 답하는 장면에서 빵 터져버렸다. 프랑스 국민들 눈에 사르코지는 정말 못난 추남인가 보다. ㅋㅋ 

 

-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 여자는 마흔 넘으면 쓸모없어, 그게 현실이야, 내 나이에 바람피우는 여자 봤어?, 그건 영화에나 나오는 일이야, 이 나이에 늙은 남자랑 연애하라고? 연하는 정말 싫어, 난 이제 손자도 생겼다고....(사귀는 사람 없냐고 제자 파비앵이 묻자)

 

- 엄마를 요양병원에 모셔놓고 차에 탄 나탈리는 아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병원에서 나는 그 지독한 냄새.... 속절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냄새 때문에.

 

- 갑작스런 자유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탈리가 영화를 보러 가는 장면이 있다. 그녀가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사랑을 카피하다>(2010). 그런데 옆자리 남자가 한없이 찝쩍대며 들이대는 통에 오랜만의 자유도 누리지 못한 채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나온다.

 

- 부부의 책이 가득 찬 서재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별거를 결정한 남편이 어느 날 자기 책들을 가져간다. 중간중간 이가 빠진 책장은 결딴난 부부의 상황을 암시하는데 그 풍경이 몹시 구체적이고도 상징적이다. 남편의 외도 소식에도 감정의 평온을 유지하던 나탈리는 열심히 메모하며 읽었던 책마저 뽑아간 남편이 야속해 분노한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폭발시키는 첫 장면. 역시 철학교사답게 감정 폭발의 도화선은 사라진 책들이었다. 

 

- 영화는 한 중년 여인의 소소한 일상을 감정을 절제한 채 담담하게 따라가지만 일반적인 서사 방식과 다른 서늘함이 있다. 어찌 보면 유머가 빠진 프랑스 버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같달까.....남편 하인츠는 저명한 철학교수인데 타인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작 본인은 오랜 시간 아내를 속이고 바람을 피운다. 하인츠의 외도가 서사의 수면 위로 드러나는 방식은 독특하다. 어느 날, 딸이 학교로 아빠를 찾아온다. 부녀 간 평범한 대화는 "아빠 다른 여자 생겼죠? 다 알고 있어요. 엄마는 아직 몰라요. 우리는 아빠가 빨리 결단을 내리길 바라요."라는 딸의 지적에 반전을 맞이한다. 하인츠는 그제서야 아내에게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고 별거를 통보한다. 일반적인 드라마였다면 딸이 아빠의 외도를 어떻게 알았는지 상세히 소개했을 테지만, 그 과정은 생략해 건너뛰어버려서 관객들도 극중 남편/아버지처럼 무방비로 그 사실을 통보받는다. 일반적으로 드라마를 끌어가는 방식이라면, 어떤 일을 계기로 딸이 아빠의 외도를 알아차린다-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갈등한다-고민하던 딸이 아빠에게 얘기한다-딸에게 지적받은 아빠는 갈등한다(<다가오는 것들>에서는 그 과정도 생략. 남편은 전격적으로 아내에게 불륜 사실을 고백한다)-이해당사자인 여자만 모르는 상황을 보여준다-관객들은 그러한 서사의 흐름에 따라 감정의 그라데이션을 순차적으로 따라가게 되는데, <다가오는 것들>은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본편을 바로 들이대는 거두절미의 영화다.  

 

- 나탈리와 집단농장에서 생활하는 젊은 여자와의 대화도 인상적이다. 나탈리는 자신이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난 다 해봤거든(그녀는 68세대). 그래, 난 변했어. 어쩔 수 없어."라고. 그러자 젊은 여자는 답한다. "세상은 아직도 그대로에요."라고. 변화에의 갈망은 젊은이들의 특권이고 안정에의 희구는 기성세대의 장기이다.  

 

- 처음 가본 극장 <아트 나인>은 소담스럽게 고즈넉했다. 아기자기한 라운지, 작은 스크린과 왼쪽 벽면을 여닫는 특색이 개성 넘쳤다. 그러나 카페를 겸한 극장 로비는 번잡했고(그래서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딱히 앉을 데가 마땅찮았고) 좌석 줄 간 경사도가 낮아 가로 자막을 읽는데 불편했다. 실제로 어제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앞자리에 앉은 여성 관객의 머리가 자막을 가리는 통에 그분 머리 움직임을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틀어가며 영화를 봐야 했다. 몹시.....피곤했다. -_-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1 Comments
S 컷과송  
영화는 나중에 언젠가 보게되겠죠...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참 가슴에 박힙니다. 이제 맑스는 없고 그저 여전히 세상을 이해하는 눈만을 공급하는 기관이 된 것이 아닌가 싶네요. 지식과 교양이 인성으로 연결되지 않은 시대에서 철학은 그저 문화자본에 불과한 것이 슬프네요. 그나저나, 프랑스는 어쩔지 몰라도 이 땅에서는 40살 넘은 여자는 여전히 사랑을 갈구하시는 분 많더군요.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회고전을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