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카피레프트 김정호

영화감상평

<고산자, 대동여지도> : 조선의 카피레프트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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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던 딱 한 가지는 영화의 전부가 되었다. 강우석이란 이름 세 글자. 보는 내내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오래전 <한반도>(2006)와 <이끼>(2010)에 심하게 덴 상처는 펄떡거리며 되살아 났다. 스릴러라던 <한반도>엔 스릴이 없었고, 미스터리 범죄물이라고 연출한 <이끼>엔 미스터리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다. 

 

 

 아무 맛도 없고 밋밋한 것. 그것이 근 십 년 내 강우석 감독 작품의 색깔이다.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 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영화 보면 대충 찍은 것 같아, 낮인데도 허옇게 뜨는 화면들 보면.... " <고산자>를 보면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겠더라. 수려한 한반도의 사계절이 아름답게 담긴 몽타주 컷 중간중간, 빛 받아 날아간 필름처럼 핀트 나간 노출 화면이 보였다. 파운데이션을 너무 많이 바른, 그래서 목과 얼굴의 경계가 너무나 뚜렷한 여자의 얼굴 같은, 그런 느낌의 화면들이 언뜻 언뜻 비쳤다. 

 

 

 고산자라는 실존 캐릭터의 매력, 드라마틱한 그의 생애, 백성들을 위해 지도를 제작해 보급하겠다는 원대한 꿈, 꿈꾸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강직한 자유로움......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스토리였다. 비주얼은 또 어떤가. 대동여지도 제작을 위해 팔도를 주유하는 고산자의 여정만큼 멋진 그림이 세상에 또 있을까. 게다가 풍성한 제작 지원에 차승원, 유준상, 김인권이라는 선 굵은 배우들까지.....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 판이었다. 멍석을 깔아줬으면 제대로 놀았어야지......

 

 

 야동을 보는 남성들의 스킬은 오직 하나다. 스킵 스킬. 야동은 빨리 감기만이 진리다.  세상엔 그렇게 대충 스킵 하며 봐야 할 것들이 있다. 강우석 감독 영화가 그렇다. 물론, 빼어난 부분도 있다.  한양 도성의 세트와 C.G.,  저잣거리의 세심한 재현, 눈물 콧물 쏙 빼는 차승원의 열연, 권력 앞에 당당한 고산자의 기개와 '정보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선각자의 꿈이라는 주제 의식 등등.  그러나 그 조각들은 전체 그림 퍼즐을 맞추는데 실패한다. 넘치는 의욕만큼 섬세한 연출이 뒷받침되지 못한 이야기는 노출이 오버된 화면처럼 허공에 붕 떠서 129분을 지리하게 떠돌아다닌다. 단단한 물성이 손에 잡혀야 할 영화(온몸으로 길을 밀고 나가 지도를 만든 인물이 주인공이라면 당연히)를 종주먹 쥔 손 사이로 모래 빠져나가듯, 맥없이 휘발돼 버리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 

 

 

  순실이나 여주댁의 연기는 외면하고 싶을 만큼 어색해서 안쓰러웠다. 다른 영화에서는 펄펄 날던 차승원과 유준상이 왜 그리 틀에 박힌 상투를 남발하는지. <뽕>의 이대근식 연기를 보는 것 같아 보는 내내 눈 둘 곳을 못 찾겠더라. 구글맵이나 내비게이션을 패러디 한 '강우석 표 유머'나 김정호와 바우 간의 유치한 슬랩스틱은 그렇다 치자. 지도 앞에서는 천하에 둘도 없이 강직한 인물이 나사 몇 개 빠진 동네 형처럼 굴다가 어느 순간엔 눈을 부라리며 대원군에게 대드는 통에 도무지 '김정호'란 인물이 뭐 하는 사람인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도 이 정도(사이코)는 아닌 것 같다. 결국, 액팅의 문제가 아니라 디렉션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가 있던 원작의 이야기는 밋밋해졌고 인물들은 하나같이 단순해졌다. 거기에 '신파'와 '국뽕'이 판을 친다. 애국애족, 나라 사랑, 백성 사랑의 구호가 절절하다. 그러니 당연히 영화는 지루할밖에.  예를 들면 아재 연출의 대표적 장면 : 지도를 탐내는 세력에게 끌려간 김정호가 국문을 당하다가 손을 잘릴 상황에 처하는데 그때 그 집에 흥선 대원군이 들이닥친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라고 궁금해할 관객들을 위해(사실, 그닥 궁금하지 않았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바우(김인권)의 얼굴이 쓱 나타나고 카메라는 의기양양해하는 바우를 한참 동안 잡아준다. 뭐 꼭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으셔도.....-_-;  쓸데없는 맨스플레인의 대표적 사례. 

 

 

스크린 X 상영을 위해 제작-촬영된 영상들은 훌륭했지만(화면 보고 멀미가 날 지경, 안경 안 끼고 보는 3D 효과랄까?), 그렇지 않은 영상들은 시야각이 넓게 트여 좋다는 것 빼고는 큰 감흥이 없었다. 영화 시작 전, 스크린 X 홍보 담당자분이 눈여겨보라고 미리 귀띔해주셨던 장면들-흥선 대원군이 난을 치는 장면, 김정호가 지도 제작을 위해 방방곡곡을 유람하는 장면, 팔만대장경 목판본을 보여주는 장면-의 효과는 멋졌지만 그게 다였다. 제대로 된 콘텐츠가 있으면 새로운 관극 효과를 통해 기존에 포화상태에 이른 영화 시장의 틈새를 개척할 수 있겠다 싶은 건 기대되는 포인트. 그러나 스크린 X용 콘텐츠가 부족한 현재는 왕초보가 모는 페라리 스포츠카를 타는 기분이랄까......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시야각이 좁아지고 답답해지는 3D와 달리 탁 트인 광시야각이 스크린 X의 장점.

 

 

 

그나저나 강우석 감독님은 왜 좋은 원작들을 가져다가 그렇게 막...그렇게 막....만드는 걸까요. ㅠㅜ 의욕은 젊은 감독들만큼 넘치면서 왜......!? 때문에!!!!

 

 

 

 

 

 

 

시사회 초대해주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제가 보기에) 아닌 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물론 영화는 개인의 취향을 타는 감상물인지라 저와 달리 재미나게 보시는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천상륙작전> 대박난 것 보세요. 600만 관객이 본 <연평해전>도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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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S 컷과송  
기다리던 글이라 정독했습니다. 강우석 감독에 대한 저의 우려를 그대로 표출해주셨네요. 어쩌면 그는 영화적 감각 혹은 리듬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영화 필모 안에서 이번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임해야하는지를 잃어버리고 웹툰, 소설을 자신의 색깔로 녹이는 것조차 자신감을 상실했는지도....김지운이 강우석의 전철을 밟지 않았는지 기다려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