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를 재구성하는 상상력의 경계

영화감상평

<찬란함의 무덤> : 세계를 재구성하는 상상력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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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발음하기 어려운 그의 이름만큼이나 낯설고 어렵다. 영화를 보고 나면 내가 무엇을 본 것인지, 그의 영화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읽어야(혹은 이해해야) 하는지 늘 혼란스럽다. <열대병>(2004) 이후 그나마 친절해졌다는 <엉클 분미>(2010)와 <찬란함의 무덤>(2015)도 관극 행위를 혼돈에 빠트리는 당혹스러움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피찻퐁 위라세라쿤의 영화를 보고 나면 딱 두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감독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우리는 그의 영화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풀네임은 생략하자)의 영화는 모호한 것 같지만 사실은 확고하고 단호하다. 영화마다 반복되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열대병>부터 <찬란함의 무덤>까지를 관통하는 위라세타쿤 감독의 주제 의식은 '현실과 꿈의 경계' 언저리를 배회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여전히 배회를 멈추지 않는다. 모호하지만 확고한 것은 꿈과 현실의 경계, 그리고 그 경계의 배회 두 가지뿐이다. 그래서 <찬란함의 무덤 (Rak ti Khon Kaen, Cemetery Of Splendour, 2015)>을 <찬란함의 무덤>으로만 감상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찬란함의 무덤> 속 주요 등장인물 젠은 <엉클 분미>에도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심지어 같은 배우(제니이라 퐁파스)가 연기한다. 그 말은 전작의 연장선상 위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세계라는 총체 안에서 개별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개별 작품들은 각각의 에피소드로 완결되지 않고 열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그의 영화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영화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반복이다. 모호한 것은 꿈과 현실의 경계이지, 위라세타쿤 감독의 어법이나 작품 세계가 아니다. 그가 그리려고 하는 소재의 어려움이 그의 영화를 대중들이 접근할 수조차 없는 난공불락의 난해함 덩어리로 만들 뿐이다.

 

 

 그의 영화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는 단단한 '벽돌이 아기 손바닥만큼 보드라운 척하다가 불룩해지면서 모양을 바꿔 사라져버리는 순간'과 같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혹은 무너뜨리는 순간)은 홍상수 세계의 그것이나 <파이 이야기>에서의 이안의 그것과도 또 다르다. 신전 제단 위에 모형으로 존재하던 두 명의 미얀마 공주가 젠 앞에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고) 현실처럼 자연스럽게 마주 앉게 되는 장면은 홍상수의 <하하하>에서 영화감독 조문경(김상경) 앞에 충무공 이순신이 갑옷을 입고 칼을 찬 채 현현한 것과는 다르다. 아무런 표식이나 유격 현상 없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완전히 허문다. 그리고 허물어졌던 환상과 현실의 상태는 다시 흔적 없이 봉합되곤 한다. 

 

 

 이러한 특성은 태국이라는 사회적, 역사적, 민족적, 신화적 특질을 빼고는 얘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우리(이방인=타자)에겐 낯설고 난해한 풍경이지만, 그네들에겐 꿈과 현실이 뒤섞이고 환상과 실재가 혼재하는 세계관은 오랜 시간 축적되고 체화된 세계관이란 것을 위라세타쿤 영화의 곳곳에서, 그 뻔뻔하리만치 당연한 서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찬란함의 무덤>에도 전작들과 연계된 태국적 세계관이 반복된다. <엉클 분미>의 중요한 모티브였던 환생이라든가, 죽은 왕조의 무덤 위에 세워진 초등학교/병원을 매개로 한 정치와 역사에 대한 은유, 죽음으로서의 잠과 그것에 투영된 꿈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추상화를 그리는(=영화를 만드는) 작업 방식 등이 여지없이 반복된다. 꾸준하게 지속되어 온 이 작업은 기존의 세계를 심화시켰다고도 평가할 수 있겠지만, <찬란함의 무덤>에서는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니었나 싶은 구석(반복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그가 그려온 세계를 심화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심리적 긴장을 완화/약화시키는 부작용)이 있다. 어쨌든 그는 아무나 생각할 수 없고 누구도 쉽게 만들 수 없는 방식으로 꾸준히 자신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런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꾸준하게-란 점에서 특히 그렇다) 어찌 보면 영화란 것은 그가 늘상 이야기하고 싶어했던(그리고 이야기했던)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우르는 예술이 아니던가. 그는 자신의 영화로 꿈을 꾸며, 자기의 꿈을 관객들에게 투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관객들이 자기 꿈에 함께 동참해주기를 고대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찬란함의 무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잠에 빠진 군인 잇(반놉 롬노이)으로 빙의한 영매 켕이 젠과 함께 (실재하지 않는) 고대 왕국의 정원을 산택하는 길고 긴 시퀀스일 것이다. 산책이 끝나갈 무렵 켕은 젠의 상처 난 다리를 어루만지며 그녀의 건강을 주술적으로 기원해준다. 켕이 만지는 것은 젠의 육신이 아니라 사랑에 괴로워하는 그녀의 고통과 외로움의 상처였을 것이다. 몽환적인 새벽, 잇의 침대맡에서 꿈에서 깨어난 젠은 자신이 현실과 꿈의 경계 사이에 있음을 인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그것 역시 꿈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와 함께 포크레인이 파헤친 흙구덩이 위에서 축구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며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처럼 두 눈을 부릅뜬 젠의 얼굴은 관객들에게 긴 여운과 슬픔을 남긴다. 

 

 

 그동안 타이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왔던 그는 <찬란함의 무덤>(2015)이 타이에서 제작하는 마지막 장편영화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피카소에게 예술적 시대 구분이 유의미했듯 예술가에게 '시대의 나이테'라는 게 있다면 이제 태국의 신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1기가 끝났음을 선언한 셈이다. 그는 자기 작품 속 인물들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있는 듯 보인다. 앞으로 새롭게 펼쳐질 그의 세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우리를 찾아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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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잇의 노트에 쓰여 있던 가장 인상적인 대사 : "인생은 촛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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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S 컷과송  
이 감독은 아직 저에게는 미지의 작가입니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1기의 종언을 선언한다는 정보 귀담아 듣겠습니다. 영화는 점점 더 영화 밖으로 나가는데, 저는 그저 현실 안에서 안주하고만 있네요.
14 스눞  
저역시 어렵게 보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함'이란 차원에서 홍상수 감독 등과 함께 유사한 위치의 세계(쉽게 흉내낼 수 없는 유니크함)를 구축한 게 아닌가....하는 정도로 감상하고 있습니다. ㅎ
28 율Elsa  
정말 신기한 영화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가 늘 그렇듯이 말입니다.
14 스눞  
그러게나 말입니다. 늘 한결같이 경이롭습니다. ㅎ

추카추카 24 Lucky Po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