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

영화감상평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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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가정에서 자란 크리스 카일은 스물일곱이던 2001년 9월,

9.11테러를 계기로 해병에 지원, 저격수로 복무하게 된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선 대전차수류탄을 품에 안고 미군을 향해 달려가는 어린이를 사살하는 것으로

그의 첫번째 임무를 묘사한다. 영화에서 어머니는 거리에서 아이에게 폭탄을 전해주고 아이는 그것을 받아

미군을 향해 달려가다 크리스가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장면을 담담하게 그린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감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열성적 공화당지지자이다.

그런만큼 그가 이 영화를 만든 건 자연스럽기까지하다.

크리스 카일은 미국이 가장 큰 충격과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스스로 전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들어간

'영웅'이었고 네 차례 파병과정에서 거둔 戰果로 '전설'이 되었으니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크리스 카일의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두 요소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 싶다.

 

전통적 관점에서 뒤에서 쏘고 여자를 쏘고 어린이를 향해 총을 드는 건 비열한 짓이고 결코 '전설'이 될 수

없는 일이지만 9.11이 바꾸어놓은 세상에선 어린이도, 등뒤의 저격도, 여자를 사살하는 것도 전부

'전설'의 근거가 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160명의 죽음에 대해 논란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 '전설'이 되었고 '영웅'으로 남았다.

카일이 참전용사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자막 이후에 덧붙여진 그의 장례 기록 화면은 어쩌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들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전설'의 죽음 앞에 경건하게 애도를 표하는 미국인들, 도로 옆에 도열해 장례 행렬을 지켜보는 미국시민들,

상이군인으로 보이는, 휠체어를 타고 오른 손엔 성조기를 든 남자, 이들을 관통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그 자리로

오게 한 것, 그것이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하고 싶은 말이었고 그것이 그로하여금 이 영화를 만들게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 영화에서 반전 메시지를 찾는 건 쉽지 않으며 반대로 "'그럼에도불구하고' 애국주의불길은 결코 꺼져서는

안된다."는 강한 메시지는 곳곳에서 읽힌다. 앞서 말한대로 영화 마지막 부분은 그 결정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라크 스나이퍼 '무스타파'는 조국을 침략,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는 외국군대와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는 '영웅'이고 '전설'이지만 미군들 눈엔 그저 중동의 바바리안일뿐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이라크 저항세력은 어린이를 전동드릴로 살해하고 살인을 밥먹듯하는 악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저 그들은 '잔인하다, 그래서 악마다'라는 묘사뿐이다.

 

이런 영화에 대해 '반전 메시지'를 품고 있으며

클린트이스트우드가 영화 어디에서도 '애국주의'를 말한 적 없다는 '변명'은 그래서 역겹고 메스껍다.

 

전쟁은 국가를 바꾸고 개인을 바꾼다.

아니, 사실은 모든 것을 바꾼다.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휴머니즘에서 '야만'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문명에서 '야만'으로,

사랑에서 '증오'로 '혐오'로,

 

세상을 그저 파괴할뿐이다.

 

'영웅'과 '전설'이 삶을 약속하지도, 사랑도, 휴머니즘도 그 어떤 미래도 가져다주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게 아이러니하고 끔찍하다.

이런 일이 반성없이, 회고나 의심없이 받아들여지는 현실 역시 공포스럽다.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그 다음 순서로 이어져왔음을 기억하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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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S 컷과송  
이 글에 덧붙일만한 기사는 아니지만, 최근 허문영 평론가가 한겨레 칼럼에 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트럼프 지지, 그리고 평론가로서 감독에 대한 지지 철회는 여러모로 복잡한 사안입니다. 요즘 학부를 비롯한 아마추어 비평가 집단은 모두 작가와 작품은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을 기초적 교양으로 학습합니다. 가령 영화 외부의 것을 영화 내부로 대입시키는 것을 꺼리는 것이지요.
님의 글은 아마도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 대한 이 땅의 시선과도 유사한 면모가 있을 것입니다. 평론가 김영진도 일갈한 바도 있구요. 새삼 웨스턴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됩니다.
1 락포토  
좋은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추카추카 8 Lucky Po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