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올 앤 아이

영화감상평

디올 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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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보고 싶었던지라 한글자막을 기다리다 지쳐 (깜냥도 안 되는데) 머리에 쥐 나면서 영어 자막으로 봤던 영화입니다. 

  오늘 드디어 한글자막이 나왔네요. 감개가 무량합니다. 자막 올려주신 분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작년에 썼던 리뷰를 올립니다.

  당장, (새빠시 한글 자막으로) 다시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때론 다큐멘터리가 극영화 보다 더 극적일 때가 있다. 한번도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극소수 고객만을 대상으로 한 명품 브랜드의 최고급 맞춤복)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는 벨기에 출신의 (아무리 그가 미니멀리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하더라도 디오르의 입장에서 보면) 신출내기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가 십수년 간 '디올'의 아틀리에에서 디올 제국을 건설해 온 장인들(Ateliers)과 대면하는 첫 장면부터 자신의 첫 컬렉션을 마칠 때까지, 영화는 척추를 빨아들일 듯한 긴장감을 당겨진 활시위처럼 유지한다. 스릴러에 버금 갈 긴장감 조성엔 시간의 데드라인-라프 시몬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8주뿐-이 일조한다. 영화는 두 개의 갈등 혹은 두 개의 대구와 대조-디올 vs 라프 시몬스, 라프 시몬스 vs 디올의 장인들-를 축으로 정해진 끝(컬렉션의 완성)을 향해 달려간다. '디올'이라는 유령(아우라)의 내레이션과 대구를 이루며 진행되는 라프의 고군분투기는 장인들과의 협업-갈등을 통해 허상(비전)에서 실체(옷)로 살이 붙는다. 라프가 눈(소프트웨어)이라면 장인들은 손(하드웨어)이다. 눈 없는 손은 '기술'에 불과하고 손 없는 눈은 '망상'으로 허공을 떠돈다. 주어진 시간은 모래처럼 흘러내리고 관객들은 '눈'과 '손'의 협업을 통해 라프의 상상력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그들과 함께 목도하며 라프/장인들에게 깊게 몰입한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 디올의 정령이 서려있는 디올의 집(아틀리에)을 지키는 장인들이라고 말한다. 디올은 그의 장인들을 누구보다 아꼈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이들이기 때문이다. 장인들도 디자이너의 각별한 애정을 이해하고 충정으로 그의 손이 되었다. 그들은 말한다. "디올의 영혼이 여전히 이곳에 있"다고.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디올을 위해 일한"다고. 디올이란 이름의 제국은 그렇게 건설됐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디올의 죽어가는 제국에 새 숨을 불어 넣은 젊은 천재 Raf 라고 할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은 보고 생각하고 조율하고 점검하는 것뿐. 심지어 그는 직접 바느질을 하지도 않고 패턴을 만들지도 못하며 스케치를 직접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가 '디자이너'인가? 그렇다. 그는 지휘자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비전을 그리고 그 밑그림에 맞춰 장인들의 작업을 조율하고 관장한다. 라프 시몬스는 손 대신에 눈과 뇌를 써서 그림을 그린다. 그것이 그가 하는 '일'이며 그 일이 창조적 작업 공정의 핵심이다. 그의 그림은 숙련된 장인들의 바느질 땀을 통해 옷으로 완성된다. 장인들은 오트 쿠튀를 만들어본 적 없는 애송이 수석 디자이너를 배척하고 그와 갈등하는 대신 '스털링 루비' Sterling Ruby의 그림을 드레스 용 옷감에 직조로 옮기는 과정에서 보여지듯 최선을 다해 그의 비전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말한다. "디자이너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맞춰주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화려한 패션쇼 무대 뒤편의 커튼 뒤에서 조용히 자신들의 작업물을 지켜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위나 바늘 같은 도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라프 시몬스는 패션 쇼 전날 조촐한 마감 파티에서 그들의 실력과 노력에 경배를 표한다) 결국 예술적 작업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디자이너의 '창의적 비전'이다. 


 그러나 다시, 이 영화의 진짜 주인은 구조화된 '디올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가 싸우는 대상은 수십 년 동안 디올의 아틀리에를 지켜온 장인들이나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디올'이란 이름의 망령이다. 디올의 역사는 젊은 디자이너의 어깨를 중압감으로 짓누른다. 그는 '새롭고 현대적인 디올'의 유전자를 늙고 지친 디올의 세계에 주입시키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8주 동안 분투한다. 그는 늘 혼자고 늘 외롭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우며 흔들릴 때, 그를 도와줄 백기사는 디올의 DNA를 가진 장인들뿐이다. 그들은 긴밀하게 협업하고 결국 공동의 목적을 쟁취한다. 디올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디올의 정신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서. 두 개의 다른 그러나 사실은 도플 갱어처럼 닮은 의제(어젠다)가 아이러니하게 부딪치는 순간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갈등 구조를 형성한다. 디올의 지속가능한 진화를 위한 디올 세계의 파괴와 일탈. 두 개의 의제가 접점을 찾아가면서 극적 갈등이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 오트 쿠튀르 콜렉션이 성황리에 끝나고 라프 시몬스와 장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들의 눈물 안에는 힘들게 싸워서 원하는 것을 쟁취한 자들의 소회와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경배가 있다. (첫 드레스 피팅 때 디자이너와 장인들 모두 자신들이 만든 옷의 아름다움에 경도된다. 그것은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다.)  그렇게 신출내기 디자이너의 첫 오트 쿠튀르 콜렉션이 **'sublime (숭고한, 지고한)' 하게 끝났다. 이제 새로운 디올의 시대가 시작됐다. 




뱀다리 : 오트 쿠튀르 패션쇼가 열린 디올 하우스의 꽃장식은 뭔가 새로운 것을 하려면 "제대로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 뱀다리 2 : sublime 은 스털링 루비 페인팅을 직조한 천의 색감을 보고 만족해 하던 라프 시몬스가 계속 뱉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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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26 naiman  
궁금하던 영화인데 봐야겠네요....리뷰 고맙습니다.....
14 스눞  
추천합니다. 꽤나 멋집니다, 라프 시몬스. ㅎㅎ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