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 생계형 재난 영화 혹은 실화가 되고 싶은 동화 같은 이야기

영화감상평

터널 : 생계형 재난 영화 혹은 실화가 되고 싶은 동화 같은 이야기

14 스눞 7 2354 2

 

8eef66e5ed77cf983319d477a058c14d_1470280075_4061.jpg

 

 

<끝까지 간다>(2013)를 몸으로 기억하며 <터널>(2016)을 봤다. 당연히, 재난 블록버스터인 줄 알고 갔다. 관객들 멱살을 잡고 2시간 동안 질질 끌고 다니던 (제목처럼) '끝까지 가'는 김성훈 감독에, 충무로 대세 배우 하정우에,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 나온 월드스타 배두나에, 천만 요정 오달수면 당연히 그럴 만하지 않겠는가? 


 오해였다. 편견은 작은 참사를 불렀다. 어!? 이게 아닌데.....다짜고짜 터널이 무너진 도입부를 지나면 영화는 '강원도 터널 안의 로빈슨 크루소'처럼 흘러간다. 시각적 쾌감이나 끝까지 달리는 느낌 대신에 잔잔하고 아기자기 한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진다. 그 게임엔 휴먼 드라마가 있다. 내가 만든 편견에 내가 맞은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때부터 온전히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터널>은 (감독의 김성훈 감독의 전작에만 빗댄다면) <끝까지 간다>보다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2006)에 더 가깝다. 그런 이상한 느낌은 순전히 터널이 무너져 매몰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느긋한 템포로 터져 나오는 유머 코드 때문이다. 심각하게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웃는다. 극 중 인물들은 하나같이 심각한데, 웃긴다. 그것도 눈치 보며 소심하게 피식- 웃는 게 아니라, 으하하하하- 골 때리네 저거....하는 식으로 빵빵 터진다. 하정우의 힘은 그만큼 대단하다. (직접 오줌을 먹었다는 것 말고 오달수가 웃긴 건 별로 없다. 아쉽다.) 피 같은 생크림 케이크를 몰래 훔쳐먹은 강아지 '탱이'의 도둑질에 "이런 개*끼....야이 개*끼야....이런 10탱이가...." 하면서 부들거리는 연기는 연기가 아닌 것만 같다. 관객들은 정수(하정우)가 터널에 매몰됐다는 것을 잠시 잊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순식간에 상황을 역전시키는 웃음의 힘은 놀랍다. 이런 종류의 홀로 고립된 인물의 재난 영화라면 늘 등장하는 환상 장면(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시원한 물에 빠져 첨벙거린다거나 하는)이나 회상 장면 한 컷 없이 생활형 유머 코드만으로 오롯이 2시간을 끌어간다.
 

 그렇다. <터널>은 생계형 재난 영화(라는 장르가 만약 있다면)라 할 만 하다. 그런 면에서는 자급자족,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만든 짜장라면을 앞에 놓고 울다 웃다 똥구멍에 털이 한 다스는 났을 <김씨 표류기>의 김씨(정재영)를 닮았다. 물이 없어 자기가 싼 오줌을 마셔야 하는 장면도 <127시간>의 그것과 또 다르다. 절박함보다는 따스함이 있다. 우연히 알게 된 또 다른 생존자에게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나누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정수(하정우)의 모습이라든가, 혼자 먹으려던 케이크를 함께 나누어 먹어야겠다 결심한다든가(결국 엉뚱한 놈이 다 먹어버렸지만? ㅋㅋ), 구조대원들을 위해 간이식당 자원봉사를 하는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의 모습이라든가, 세현이 부쳐준 계란 프라이가 실수로 땅에 떨어지자 괜찮다며 그걸 집어 빗물에 씻어 입에 넣는 구조대원들 모습이라든가..... 에피소드들은 하나같이 인간적이다. 재난 영화의 그 흔한 극적 과장 없이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재난 상황을 묘사한다. 관객들은 과장된 극적 서스펜스 대신에 재난의 현실적 체감을 경험한다. 터널에 갇힌 한 사내의 사질적 모노드라마라고 할까. 


 우스꽝스럽게 과장된 것은 재난상황에 대처하는 정부 관료와 언론의 태도다. (아마도 청와대에 앉아 있는 그 누군가를 극화한 듯 보이는) 여성 장관을 비롯한 관료 및 정치인들은 세월호 사고나 메르스 사태 때의 한국 정치인들처럼 묘사되고 희화화된다.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가시처럼 <터널>을 보는 내내 세월호의 잔상이 겹치고 이명이 울리는 것은 개인적 관점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이들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공감이다. 


 하정우의 원맨쇼는 '역시 하정우!'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그 상황에서 웃을 수(혹은 웃길 수) 없었을 것이다. 웃겼다면 웃기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정우는 관객들을 웃기고 울린다. 그만큼 김성훈 감독의 유머 코드는 재난 영화를 요리하는 솜씨만큼 독특하다. 함부로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 배두나의 자연스러움도 여전했다. 그녀가 왜 워쇼스키 자매 및 유수의 외국 감독들에게 선택받는 배우인지 확실하게 증명한다. '탱이'란 이름으로 깜짝 등장한 퍼그 종 강아지의 열연도 <터널>의 놓칠 수 없는 재미 중 하나다.




 자, 이제 아쉬웠던 점에 대한 얘기. 

 - 실화(사실감) 같다고도 동화(허구) 같다고도 못할 어정쩡함.

 - 오달수는 <올드 보이> 이후에 유사한 이미지로 너무 많이 소비되었다. 보는 이들도 조금씩 지치기 시작. 그리고 발성에 문제가 좀 있다. 아니, 많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대사가 태반이다.

 - 영화는 정수(하정우)가 갑작스레 밀실공포를 느끼는 장면을 기점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극명하게 나뉜다. 전반부가 느릿하지만 경쾌했다면 신파가 섞여들기 시작한 후반부는 느리고 처연하고 정색한 채 답답하다. 엘리베이션 없이 갑가지 튀어나온 밀실공포도 부담스럽다.

 - 등장인물들의 인간미에 집중하거나 정부/언론의 태도를 성토하는 쪽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구조작업 부분은 중간에 사라져 버린다. 균형감을 맞추며 두 부분을 같이 끌고 갔어야 좀 더 긴장감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 선인과 악인의 구분이 너무 또렷해서 촌스러웠다. 착한 사람은 너무 착하게 악한 것들은 너무 악하게,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는 언제나 극적 긴장을 무력화시키고 개연성을 망친다. 




 그 외

 - 예기치 않은 생존자로 젊은 여자가 등장하는데 배우가 누군지 모르겠다. 검색을 해봐도 안 나오고 시종일관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라 누군지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남편이 터널에 갇힌 걸 알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온 아내 세현(배두나)이 저녁 밥상을 앞에 놓고 차마 밥을 먹지 못하던 장면이었다. 세월호 이후 살아남은 이들이 느끼고 있는 먹먹한 부채감 같은 것이 잘 형상화된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봤다.  

8eef66e5ed77cf983319d477a058c14d_1470280115_3491.jpg



삶의 우연이란 얼마나 아이러니 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던 첫 장면. 기름을 넣으러 주유소에 들른 정수(하정우)는 귀가 어두운 주유소 할아버지 때문에 원치 않는 기름 만땅(정수는 3만 원어치만 넣어 달라고 했다)에 출발하려는 차를 붙들고 건네준 작은 생수 두 병을 선물로 받는다. 그 물과 기름이 얼마나 자기 삶에 소중한 것인지 당시의 정수는 알지 못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비애와 그로 인한 인생의 아이러니.

 - 클래식 음악방송 라디오 DJ로 특별출연한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의 목소리 연기는 제법 별로였다.  특히나 사연 읽는 부분은 영....ㅋㅋ 그 아쉬움을 빨간 안경 뒤태 출연으로 상쇄시킨다. 

 - 박찬호 키드, 박세리 키드, 김연아 키드처럼 <터널>이나 <부산행> 모두 세월호 세대의 재난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몰고 온 사회적 파장은 우리 사회에 짙고도 깊은 상흔을 남겼음을 증거하는 영화들.

 - 세월호의 상처에 대한 씻김굿 같은 영화. 그러나 너무 동화 같아서 아쉽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7 Comments
26 naiman  
잘봤습니다....궁금증을 자아내게하는 리뷰네요....보고싶어 졌습니다.....
14 스눞  
나름 재밌고 특이합니다. 내난 블록버스터를 기대했던 분들에겐 의외겠지만요. 아직 개봉 전이고 어제 시사 초대로 보고 왔습니다. 모자란 리뷰 늘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26 naiman  
갑자기 캐스트 어웨이도 생각나네요...혼자 생존과 고독속에서 몸부림치는....
14 스눞  
그만큼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하정우의 원맨 쇼이기도 해서 캐스트 어웨이와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ㅎㅎ
S 티거  
원래 하정우라는 배우를 좋아해서 기대하는 영화였는데
리뷰를 읽고나니 더 보고 싶어지네요
잘봤습니다^^
14 스눞  
하정우를 좋아하신다면 몹시 재미나게 보실 것 같습니다. ㅎㅎ
추천합니다.
10 사라만두  
마지막 자평에 쓴웃음 짓고 갑니다.. 우리나라는 누군가를 달래주는데 참 인색하네요 위안부든 세월호든 말이죠 진심가득한 사과의 부재를 대신하는 다이빙벨과 귀향의 강행군도 필요하지만 이런 연출도 정말 좋았습니다 날카로운 평 힘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