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9점] 우리들(2016)

영화감상평

[리뷰: 9점] 우리들(2016)

28 godELSA 1 2390 0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동화가 아니다. '우리들' 이야기다.
평점 ★★★★☆

"우리들".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나는 우연히 한 포털 사이트에서 배너로 간략히 이 영화를 한 줄로 소개하는 글을 지나가면서 보았다. 아마 그게 광고글이었으리라 싶다. 거기에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적혀있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 동화’라고 적혀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하고 나고 감상을 한 직후, ‘동화’라는 타이틀이 과연 어울리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1. 카메라.
 "우리들"은 어린이들의 이야기다. 그건 맞다. 극 중 주요 인물들은 초등학교 4학년들이며 카메라의 위치나 시선, 이야기의 관점도 그 나이대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전혀 유치하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그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와 너무 유사하기 때문이다. 놀라웠다. 윤가은 감독은 GV에서, “어린이와 어른의 세계에는 본질적으로 경계가 없으며 우리가 말하는 ‘어른의 세계’는 (우리가 겪었던) ‘어린이의 세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답했다. 이 대답을 해석하자면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는 나이와 세대에 따른 기준일 뿐, 인간의 심리적인 내면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어른들의 세계로 아이들을 끌어오는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아이들의 세계를 보여주기를 택한 이유도 아마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윤가은 감독은 그러한 내면의 세계로 관객들을 인도한다. 제작기에서 밝혔듯이 2년이 넘는 시나리오 작업 기간 동안 이야기 속 사건을 확장하는 대신 인물의 감정을 깊게 파고들려도 했다고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들"은 그러한 감정의 굴곡의 표현에 있어서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윤가은 감독 작품들은 미니멀하다. 단편 "손님"에서도 그러했지만(또다른 단편 "콩나물"은 보지 못했다) 그녀만의 영화적 스타일은 마치 다르덴 형제를 연상시키게 한다.
 
 이것은 표면적 모방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한국독립영화들의 경향이 다르덴 형제를 모방하고는 있지만 질문이 대부분 생략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캐릭터에 대한 질문이나 이해 없이 단순히 따라가기만 하는 그런 카메라 워크를 이송희일 감독은 가리켜 “질문을 생략한 모방”이라고 하였다. 캐릭터를 단순히 따라가는 것만으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내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미학이 거칠고 아주 쉬워보여도 사실은 섬세하고 아주 어렵기도 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질문의 유무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독립영화 추세 안에서도 "파수꾼"과 같은 작품들이 핸드-헬드 기법의 미학을 잘 녹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을 나열한다면 아마 "우리들"도 같이 나열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첫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학교 운동장에서 편을 정하고 있는 듯한 아이들의 목소리들이 들리는데, 카메라는 주인공 ‘선’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당기며 계속 응시한다. ‘선’은 시선을 어디 한 곳에 두지 못하고 계속 방황하는데 끝내 편이 정해져도 시무룩한 말투로 아이들에게 타박을 받는다. 이 시퀀스를 이루는 컷들은 단 두 컷이다. 이 간단한 컷 구성 안에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총체적인 집약이 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아이들의 세계에서의 인간관계와 그 세계 안에서의 ‘선’의 계급적 위치, 그러한 계급에 놓여짐으로서 다른 아이들에게 배척당할 수 밖에 없는 심리를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여기서 윤가은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만든다. 관객들이 캐릭터에 몰입하고 되는 근간도 이러한 입체성에 비롯하게 되는데 (다른 영화들도 그렇지만) 특히 내면이 중심이 되는 영화라면 캐릭터를 단순명료하고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게다가 다큐멘터리 같이 보이려는 연출을 의도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은 어떠한 부차적인 설명 없이 캐릭터를 단시간에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관객의 머리 속에 캐릭터를 각인시키는데 생각해 볼 수록 그에 대해서 정교한 구성과 섬세한 기법이 바탕이 되어있기 때문을 실감하게 된다.
 
2. 아이들의 세계, 어른의 세계.
 영화의 첫 시퀀스를 보는 동안 나도 동화 같은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주인공 ‘선’은 왕따이고 자신에게 진실하고 친절한 친구를 찾음으로서 상처를 위로받고 상황을 헤쳐나가는 그런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같이 어떠한 판타지를 통해 동화적인 위로를 주는 그런 이야기로 전개될 것 같다는 생각도 솔직히 하였다. 초반까진 그래보였다. 그런데 중반부부터 나의 예상을 점차 뒤엎더니 점차 관계는 복잡해지는 영화에 나는 일종의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영화 안에서 보여지는 아이들의 세계는 확고하다. 직간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불특정 다수의 상층(上層)의 소집단이 있고, 그 집단으로부터 폭력을 받는 하층(下層)의 개인이 있다. 주인공 ‘선’은 명백하게 하층이다. (아시다시피 ‘보라’는 상층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계층이 고착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경된다는 사실이다. 극 중 내용 일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전학 온 ‘지아’는 자신에게 친절한 ‘선’과 절친 사이가 되다가 또래들의 세계에 적응한 후로 ‘선’을 멀리하고 ‘보라’와 친해지려고 한다. 하지만 '보라'는 '지아'가 자신보다 성적이 잘 나온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선은 보라를 위로하며 서로 가까워진다. 그 대신 지아가 왕따를 당하게 되고 선은 그것을 바라보고 미안함을 느낀다.
 
 사실 이쯤 되면 아이들의 계급의 기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왜 ‘선’은 폭력을 당하고 있고 왜 ‘지아’는 보라와 친해지면서 계급의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가? ‘보라’는 왜 ‘지아’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폭력의 방향을 지아에게 바꾸면서까지 학교에서 우월적인 존재로 머무려 하는 것인가?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왜 그런 시스템으로 학교라는 작은 사회는 운영되는가? 어떻게 보면 관객은 극 중 어른들처럼 “아이들은 그렇게 크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합리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이 영화의 함정이다.
  
 사실 "우리들"에서는 선과 악의 개념이 희미하다. 왜냐하면 캐릭터마다 각자의 드라마틱한 사연과 동기가 부여되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보라’가 만든 시스템 같지만, 점점 그 원인을 알아볼수록 그 세계는 아이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만들어진 세계에 순응하고 지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과 ‘지아’, ‘보라’ 모두에게 강요당하는 경쟁 사회의 여파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지금 배우지 않으면 바보 된다”는 극중 대사처럼,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경쟁 사회를 아이들의 방식으로 서열화하고 계급화한 단면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어른들은 (어른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단순한 순응을 요구할 뿐이며 아이들도 (어른들은 자신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 같이) 자신의 고민을 어른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이러한 세대 간의 소통의 부재는 경쟁에 찌들어 있는 한국 사회의 불균형한 모습에 대해서 환기하기도 한다.
 
3. 관계.
 말이 많았는데 무엇보다 "우리들"은 인간 관계에 관한 영화다. 그것이 핵심이다. 애초에 아이들은 서로를 껄끄러워 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를 싫어하는 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나, 서로 이혼한 지아의 부모님의 관계가 그러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찬가지로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어른들을 흉내내려는 ‘보라’도 ‘선’에게는 이해가 되지 못하는 대상이었다. 
 
 사실 이러한 관계적인 문제에는 복잡한 것들이 겹쳐있기 마련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경쟁사회의 그림자도 작용했을 것이고, 개개인의 감정의 문제도 존재할 것이다. 어느 하나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가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윤가은 감독은 원인을 파고 들려고 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는 것인지,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지의 문제로 귀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영화는 매우 표면적인 시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입체적으로 문제를 부각할 수 있었던 대목은 바로 ‘보편성’에 있다. "우리들"은 관계 그 자체를 파고들면서 세대를 막론하고 인간 관계의 공통점을 찾아 짚으려 한다. ‘할아버지-아버지’ 관계와 ‘지아-선’의 관계 등 전체적으로 상당히 유사해보이는 ‘관계’에 대한 지점들이 많이 보이는데 여기서 영화는 개개인의 문제를 떠나서 인간 사회의 전체적인 군상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한다. 
 
 하지만 윤가은 감독은 더 나아가서 왜 사람들은 화해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까지 다다른다. ‘지아’와의 갈등이 절정에 다다름에 따라 ‘선’은 어쩌할 줄 모르는 상황에 빠진다 그런 와중에 ‘윤’의 마지막 대사가 질문의 해답을 역설한다. ‘윤’은 자신을 상처 입히는 아이와 놀고 싶어하는 아이다. 어머니와 누나가 어울리지 말라고 해도 그 아이와 어울린다. 왜 굳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아이와 어울리려고 하는 것인가? 왜 그 애에게 입은 상처를 ‘윤’은 아프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인가? ‘윤’의 목적은 단순하다. 그냥 그 아이와 놀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윤’도 당연히 자신도 모르게 그 아이와 인간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일부분 희생하고 그것을 행함으로서 끝내 그 관계에서 오는 목적을 이루어낸 것이다. 또는 어쩌면 윤이 말한 ‘논다’는 단어의 의미은 관계의 회복을 뜻할 수도 있다. 어떠한 뜻이든 간에 희생이 바탕이 된다는 말로 보인다. 물론 그 관계는 다소 일방적인 관계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윤'의 태도를 내보이며 자세를 긍정한다.
 
 그 말을 듣고 끝내 ‘선’도 ‘지아’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영화가 끝나 버려 알 수 없다. 윤가은 감독도 그 이후의 이야기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겠다고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 추측컨대 한 프레임 안에 널찍하게 나란히 자리잡은 채 눈을 맞추며 서로를 바라보는 ‘선’과 ‘지아’는 아마 관계를 회복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화해는 ‘선’의 희생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아’에게도 자신의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서로를 일부분 희생함으로서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했을 것이라는 암시도 여러 군데 있다.
 
 선과 지아의 관계가 비틀어지고 나서부터는 서로가 눈을 피하더니 다시 눈을 마주치고, 서로 분리되었던 인물 컷들이 다시 하나로 나란히 합쳐졌을 때 "우리들"은 올바른 대인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그것을 위해선 무엇이 근간이 되어야 하며, 또한 그러한 근간을 위해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까지 아우른다. 개개인의 ‘우리들’이 집단체의 ‘우리’로 연결되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윤가은 감독의 염원이 담겨있는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성장담이랄까.
 
여러 의미로 뛰어난 통찰력과 기교를 통해 이야기를 넓게 확장시키는 힘을 가진 올해의 데뷔작이자 한국영화 최고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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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16 이스라필  
자칫 잘못하면 굉장히 진부할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재밌게 봤네요^^

추카추카 16 Lucky Po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