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9점] 곡성(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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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에 비견될 만한) 한국영화의 악마를 깨우는 나홍진의 작두.
평점 ★★★★☆
<곡성>. 올해 한국영화가 시들시들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곡성>은 파워풀하다. 탄탄한 서스펜스와 블랙코미디에다가 장소마저 하나의 유기적인 캐릭터로 보이게 만드는 촬영, 배우들의 묵직한 연기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에 비견될 만할 정도로 괴기스런 에너지를 가졌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곡성>은 영화를 보고 나서 거대한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기도 하다. 내가 영화를 본지 사흘이 지난 오늘 이 글을 쓰게 된 건 그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든 느낌? 지금 인터넷에서 여러 해석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듯이 나도 헷갈렸다. 스토리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건 맥락만 잘 따라가면 어느 정도 끼워맞출 수 있다. 다만, 영화에서 제시하는 모든 것을 맞추어보아도 끝끝내 의문이 남는다. 도대체 왜 일광(황정민)은 굳이 ‘곡성(谷成)’에서 미끼를 드리웠을까. 겨우 살을 베는 굿으로 버는 1천만원 때문에 악마를 다루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일광 캐릭터는 불분명하기를 넘어서 아예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홀연히 나타나서 굿을 하고 결말에 이르러서 사건을 떠나는 인물이다. 종구(곽도원)에게 처음으로 소개될 때도 구전으로 소개를 받을 뿐 한참 후에 직접적인 등장이 시작됨에 따라 동시에 역할을 수행하고, 역할이 끝나자 그 후의 등장은 대부분 존재감이 부재되고 있다. 즉, 나홍진 감독은 일광의 존재 자체를 미스터리하게 만든다. 왜 곡성에 오게 되었는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왜 주인공 주변에 서성이는 것인지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종구에게 닥친 사연이 일광에게 비쳐져 정의로운 현인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일 뿐, 이른바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이 많다. 플롯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캐릭터들의 성향이 아예 재구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구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분노하고 살인을 저지르려고 마음 먹고, 외지인(쿠니무라 준)은 마을에 퍼진 괴소문의 대상인 동시에 종구 일당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눈물을 흘기며 쫓기기까지 한다. 무명(천우희)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가 헷갈리는 미스터리한 인물이고. 선악에 대해서 경계를 분명하게 허무면서 인물들을 교집합에 배치하여 놓는다. 각각의 시선에 따라 선과 악으로 다르게 해석되고 비춰지는 인물들은 마치 관객에게 ‘선악’이 분명하게 제시될 수 있느냐고 되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나홍진 감독은 관객에게 무엇을 보게 하고 싶었는가? 분명한 것은 ‘모호함’이다. 이른바 본능의 나락에 점차 빠져 들어감에 따라 행동하는 원시성만이 자리잡고 있고 행동 자체에만 주목할 뿐이다. <곡성>에서 마을에서 일어하는 사건들이 정말로 마을 사람들의 말대로 초자연현상인지, 야생 독버섯에 의한 사태인지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즉, <곡성>은 사건들에 대해서 모든 합리적 판단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동시에 모든 윤리적인 가치 판단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가치 판단의 근거는 바로 ‘종교’다. <곡성>은 한국과 네팔의 토속신앙, 기독교적인 요소가 섞여있는 오컬트 장르의 영화다.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1]“장르를 비틀기 위해서 가장 클리셰적인 종교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모든 종교에서는 생(生)과 사(死)가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귀신은 무엇인가? 나홍진 감독도 “그 많은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의 몸을 지닌 귀신은 무슨 존재인가”라고 자문했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데 실존하지 않는 존재. 역시 애매모호하다. 이것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인용되는 마태복음 24장, 37~39절의 내용과 상통한다. 외지인의 정체가 불분명하기에 원흉의 정체도 불분명하다. 그렇다면 신은 있는 것인가? 역시나 불분명하다. 그렇게 종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폭력의 피해자의 곡성(哭聲)만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나홍진 감독은 이러한 모호함과 불분명함을 내세워 관객을 맥거핀으로 낚는다. (외지인이 낚시줄에 미끼를 꿰어 강에 던지는 첫 시퀀스가 그것을 암시하듯이.) 심지어 영화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기도 한다. 불에 탄 가택 현장에서 무명이 홀연히 사라지고 외지인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종구를 습격하고, 종구가 악몽을 꾸다가 깨는 시퀀스로 연결되는 편집은 비현실적이다. 여기서 나홍진 감독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게임을 걸어온다. 의도적인 헷갈림. 관객은 그 안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고 거기서 혼란에 빠진다. 대신 그 혼란안에서 나홍진 감독은 선악의 근거를 인간의 본성으로 끌어온다. 마치 종구가 무명 앞에서 가족에게로 향할지 기다릴지 고민하는 것과 동굴 안의 외지인의 모습이 이삼(김도윤)의 의심에 따라 보이는 것처럼. 거기서 무엇이 꿈인지 사실인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선인지 악인지를 '믿고 합리화'하는 것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아니, 과연 이 영화 어디에서라도 선악과 진실, 거짓은 명확하게 이분될 수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이 불분명할 때 관념들은 각자의 믿음에 따라 달렸다. <곡성>은 믿음에 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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