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10점] 괴물(2006)
21세기에 들어서 가장 한국적이고 정치적인 위대한 걸작.
평점 ★★★★★
<괴물>은 나의 인생작을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다. 그 기준이 뭐냐고 묻는다면 너무 주관적이어서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 속에 인생 작품은 가지고 있을 것 아닌가. 내가 영화에 빠지게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그 충격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도 드물고 세 번 넘게 보는 것은 지겨워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괴물>만은 십 몇 회를 돌려봤다. 비디오 가게에서 어렵사리 비디오를 대여받으면 그걸 세 네번 연이어 돌려서 보기도 했다. 내가 왜 그렇게 이 영화를 좋아했는지는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독특한 음악이나 초등학생이었던 당시의 괴수물에 대한 오락적 흥미였을지는 몰라도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을 진작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개봉한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괴물>은 여전히 새롭다. 한강에 괴물이 출현했다는 익숙한 일상의 변주부터 상당히 똘끼가 넘치지만 거기다가 여러 장르를 버무리는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혼합 장르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의 계보를 이어 2000년대 한국 영화를 말할 때 주목 받는 특징 중 하나다. 봉준호 감독은 철저하게 그 시대에서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한국 대중영화의 영역이 새로이 개척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그때, 봉준호 감독도 역시 <괴물>을 제작하여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작품을 내놓았다. 괴수물의 틀을 가져와 가족 드라마를 버무렸으며 동시에 사회극을 밀도 있게 섞어 놓았다.
<괴물>이 회자되는 이유가 어떠한 (이제는 거의 의미를 잃어버린) 충무로 오락영화라는 타이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이 만든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들이 작품 곳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아직도 유효하다. 봉준호 감독은 언제나 소시민을 주제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겸비해왔다. <플란다스의 개>에선 사회를 향해 몸을 풀었다면 <살인의 추억>에서는 본격적으로 역사가 된 과거를 가져와 당대의 정치 권력을 조롱하였으며, <괴물>은 현재를 투영한 미래(판타지)를 끌어들여 현재의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그에 대해 맞섰다. <괴물>이 아직도 유효한 이유가 바로 미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라는 표피를 쓴 인재(人災), 즉 괴물은 국제사회(미국으로 대표된다)에 대한 어떠한 은유이며 한강이라는 역사적으로나 생활적으로 밀접된 공간은 소시민에 대한 은유이다.(이 영화에는 소시민을 대표하는 오브제들이 다수 설치되어 있다. 맥주, 동전 등등) 괴물이 한강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사람들을 습격하는 데에 있어 봉준호 감독은 자유주의적인 메시지를 암시한다. 소시민의 평화로운 일상에 무책임한 국가관이 점차 개입될 때 소시민들의 일상은 파괴될 수 밖에 없다는 경고이며 결국 삶을 되찾기 위한 소시민들의 투쟁의 터전은 하수구로 귀결된다. 하수구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투쟁의 터전인 동시에 추악한 권력(괴물)이 생활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하고 대립되면서 결국 ‘소시민-권력‘의 수직적인 사회적 구도에 대한 반란 또는 내전을 암시한다. 메타포들이 공존하면서 봉준호 감독은 유기적인 알레고리를 완성한다.
이러한 알레고리의 완성은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결과적으로 무거운 주제를 유머스럽고도 진중하게 풀어내는 화법을 변주하는 봉준호 감독의 유연함을 증명해내기도 한다.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것이 미국에 대한 반감인지 무능력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반감인지는 해석에 따라 다르고 영화의 사건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비판의 삿대질을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는다.(어쩌면 그러한 모호함을 의도한 둘 다를 향한 비판일 수도 있겠다) 소시민들의 편을 들어주며 소시민들의 삶의 터전을 되찾아 준다. 휴머니즘의 완성. 눈 내리는 한강에서 양아들과 같이 따뜻한 밥을 먹는 마지막 장면은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다. <살인의 추억>에 더 나아가 봉준호 감독만의 인간미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괴물>이 아름다운 이유다. 국가는 죽었고 삶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