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아들 - 10점을 줄 수는 없다

영화감상평

사울의 아들 - 10점을 줄 수는 없다

2 칼도 1 23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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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같은 이가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굳이 사울 같이 행동하는 이가 주인공이 된 것은 영화에 어떤 포인트를 줄까? 사울은 동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중차대한 임무를 소흘히 하면서 아들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아이를 정식으로 장례치러주는데 집요하게 매달린다. 사람들이 물건 취급 받으며 천명 단위씩 죽어나가고 불태워지고 재가되어 버려지는 생지옥에서 그 아이 하나에게만 인간다운 마지막 길을 보내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떤 신이 그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곱게 보아줄까? 그의 말대로 거기 들어온 순간 그들 모두는 이미 죽은 목숨이기에 그렇게 전적으로 자기에만 집중하는 것인가? 

 

그러나 삶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포기해서 대의나 (아직 살아있는) 타인들이나 자신에 대한 배려에는 별 관심없는  그라면 도대체 어떤 '다른' 희망을 갖고서 그 아이에게 제대로 된 장례 절차를 치러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일까? 객관적으로 그곳에서 존더코만도 대원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싸우다, 저항하다 죽는 것, 즉 인간답게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은 그 희망에 누구보다도 더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가 아니라 그 희망에 가장 시큰둥한 이, 그 희망이 실현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 하루라도 더 살아 있어야 할 동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사울이다. 그 유일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사울의 아들>의 포인트는 무엇인가?  진부하고 고전적인 영웅물이 되지 않는 것인가? 사울의 비뚤어짐과 뒤틀림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심연을 더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영화는 홀로코스트의 재현은 어떤 공포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아서는 안된다는 직관적 깨달음을 잘 구현했다. 35mm 필름 사용과 배경 흐리기는 이 영화가 구경거리가 되기 힘들게 하는데 기여했다. 가장 정신적이고 객관적인 감각인 청각에 호소함으로써 영화는 관객들이 생각하고 상상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인간성을 전적으로 결여한 나치 장교들의 형상화는 압도적이었다. 존더코만도대원들의 모습을 통해 아우슈비츠에도 약간의 숨쉴 공기와 일상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은 리얼했다.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됨으로써 영화는 홀로코스트의 진실에 더 다가갔다. 이 모든 훌륭함만으로도 이 영화는 찬양받을 만하다. 

 

그러나 영화의 기둥이 되는 주요 서사는 불만족스럽다. 물살 속에서 소년의 주검을 놓치고 폐가에서 아마 그 소년과 닮아보였을 다른 소년을 보고서 처음으로 사울이 웃음을 짓는 장면까지 고려해도 그렇다. 그 장면에서 사울의 반성을 읽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울이 반성했어야 했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은 개연적이지 않다. 물론 사울의 행동에 어떤 긍정적인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 행동에 그런 의미를 부여할 만한, 홀로코스트에 공정한 어떤 해석학도 나는 생각할 수 없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사울이 '문자 그대로' 뒤틀려 있었고 비뚤어져 있었다는 것이 다이고 <사울의 아들>은  그 사울을 주인공으로 삼아 주요 서사를 전개함으로써 다소간 색다른 홀로코스트 영화인 동시에 다소간 뜬금없는 영화가, 포인트가 부족한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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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서 다루는 역사는 예외이며, 이례적인 예외이며, 예외 중에서도 완전 차원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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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는 예외라기보다는 정점이다. 정점을 예외라고 단정하는 한 제대로 된 홀로코스트 영화는 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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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인공만 찍을 것이지만, 우리가 찍을 주인공 사울은 공포에 질려 주변 상황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사울은 그 주변을 마주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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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얼굴에는 공포에 짓눌려 있는 표정은 없다. 아웃 오브 포커스는 카메라의 시선이지 사울의 시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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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사운드로 볼 수 있는 장면은 단 하나, 막 도착한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몰아넣고 문을 두들기는 장면 뿐, 이 영화에서 사운드는 사실상 주고 있는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라즐로 네메스는 사운드도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정보를 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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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영화와 달리 이미지에 세부적인 정보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사운드에 더 귀를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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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이야기합니다. 상상하게 만드는 순간, 홀로코스트 영화는 포르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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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자극하는 요소가 없다면 예술은 시체다. 어떻게 자극하느냐, 어떤 상상이냐가 문제지 상상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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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고네의 이 결정을, 사울의 행동에 비추어 보는 설명에 저는 반대합니다. 오빠가 죽자 다른 오빠가 절대 그를 매장하지 말라고 했지만, 안티고네는 이를 거역하고 죽은 오빠를 매장했습니다. 안티고네의 이 결정을, 사울의 행동에 비추어 보는 설명에 저는 반대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매장에 실패하는 영화입니다. 올바른 매장을 하지 못합니다. 아들은 강물에 떠내려가버리고, 사울은 그 시체를 잃어버린 채 오두막에 돌아와 총을 맞고 죽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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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행동을 안티고네의 행동과 같은 류로 보는 것이 부당한 것은 사울이 매장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울의 행동에 윤리성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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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아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한 장면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보는 쇼트가 한 쇼트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전지적 시점 쇼트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 영화는 신의 시점이 없는 영화입니다. 이 장소에는 신이 없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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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소에 신이 없다면 자신의 아들이라는 증거도 없는 아이의 주검에 제대로 된 종교적 장례를 치러주려는 사울의 고집은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인가? 존더코만도 대원들은 누구에게 기도를 웅얼거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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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믿음에 대한 영화입니다. 행위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 행위가 가치가 있느냐, 그 믿음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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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맹점은 이 믿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정확히 어떤 믿음인지, 이 믿음과 그에 따른 행동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논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었다기보다는 아예 해석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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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사울은 바울이 된 겁니다. 사울은 이 아이를 랍비를 찾아 매장하는 일에 모든 걸 바치게 됩니다. 이 때 뭔가가 바뀐 겁니다. 영화는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하기 위해 이 장면을 이렇게 찍었습니다. 그가 고군분투하고 돌아다니는 것만 보는 것으로는 이 영화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이 아이에게 기도해주면, 무언가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환기시켜 드립니다. 사울의 아들은 믿음에 관한 영화입니다. 라즐로 네메스는 이 영화, 이 장소, 이 공장, 이 시체들 속에서 믿음만이 사울을 인간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 아이가 죽어버렸을 때, 아이를 올바르게 장례를 치르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것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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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감독의 의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사울을 인간으로 만들어준다는 그 믿음이 과연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 줄 종류의 믿음이냐는 것, 사울의 그 믿음과 그에 따른 행동에 어떤 윤리적 보편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바울은 기독교에 세계종교로서의 보편적 지향을 만들어준 인물이다.  만약 영화의 포인트가 사울의 그 믿음과 그에 따른 행동의 가치에 대해 관객 각자가 질문을 던지게 하는데 있다면 영화는 실패했다.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오직 극단적으로 명백한 입장만이, 홀로코스는 문명의 필연적 대실패이며 (예외가 아니라), 거기서 인간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소통 불가능한 주관적 믿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통한 인간적 죽음의 추구라는 입장만이  공정하다. 관객은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의 자유를 허용받아서는 안된다. 거기서 사울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과 그 사실을 홀로코스트 영화의 제재로 삼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태이다. 영화는 홀로코스트라는 극단적으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사울이라는 한 우발적 주관성의 상관항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시킴으로서 관객에게 홀로코스트를 상상하고 사유하게 하기보다는 사울은 왜 저럴까라는, 어떤 납득될 수 있는 답도 내릴 수 없는, 아니 아예 어떤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한 질문을 강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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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14 소맥  
와 길다 작성하다 글 날리면 짜증지대로 나겠어요 아직 못본 영화인데 글 다 읽으니 영화 다 본것처럼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