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6점] 미몽 - 죽음의 자장가(1936)

영화감상평

[리뷰: 6점] 미몽 - 죽음의 자장가(1936)

28 godELSA 0 2761 1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여성주의를 가두는 보수적 족쇄라니.

평점 ★★★


<미몽 : 죽음의 자장가>. 한국고전영화에는 거의 관심도 없었던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 평소대로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찾아보다가 한국자료영상원 채널의 동영상이 나에게 추천되어 있길래 보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 영화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한국영화인 줄은 몰랐다. 완전히 파괴된 사운드의 상태나 필름에 거의 덧칠해져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스크래치가 그것을 보증해주었던 건가 싶다. 솔직히 대사나 상황도 촌스럽다.


옛날에 일시적으로 향유하다가 그 시대에 머물러버린 영화는 많다. 개인적으로 고전영화는 어떠한 영화사적인 의의를 가지지 않고서는 굳이 그 시대의 작품들은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예술사(藝術史)를 공부하거나 탐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감상한다면 모르겠지만 시대에 맞지도 않은 정서에 굳이 내가 억지로 이해해가면서 볼 이유라도 있는가? 그정서를 현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관객에게 이해하게 만든다면 그 작품이 시간을 초월한, 소위 말해서 걸작 또는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래서 <미몽 :~>도 유튜브가 아니었으면 아마 내 인생에서 영원히 볼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작’뿐만이 아니더라도 모든 영화는 ‘시간’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현대영화에서 아무리 역사를 자연스럽게 화면에 담아내려고 하더라도 고전영화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자연스러움에는 비교될 바가 못된다. 최근의 <암살>처럼 현대에서 기술적으로 발전을 하고 자본이 아무리 투입되어도 영화의 풍경, 즉 역사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고전영화는 그 풍경을 옮겨내는 힘이 있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미몽> 같은 사실주의 영화면 더욱 그렇다.


<미몽 : 죽음의 자장가>는 첫 시퀀스부터가 인상적이다. 부유해보이는 기와집 안에서 남편은 신문을 읽고 있고 아내 애순는 화장을 하고 있다. 남편이 아내에게 ‘어딜 가느냐’고 묻는데, 애순은 짜증나는 목소리로 ‘데파트에 가요’ 이런다. 뭔가 충격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남편이 묻는 말에 애순은 아예 대놓고 짜증을 낸다. 심지어 딸 정희의 옷을 사주라는 남편의 말에도 ‘내가 왜 사주냐’고 반문하는 식이다. 그런데 남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뭔가 아이러니다. 게다가 남편이 비춰지는 화장대 거울을 아내는 쳐내기까지 하는데, 가부장적인 가족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버린 모습을 연출한다.


그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애순’이다. 체면을 중시하고 가족을 챙기는 남편과 어머니 ‘애순’에게 애정을 보이는 딸 ‘정희’는 가족애라는 개념으로 뭉쳐지는, 가장 시대에 편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애순은 체면을 중시하지도 않고 딸의 처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며되려 자유분방하게 다닌다. 집에서 나갈 것이라고 남편에게 협박(?)을 하는 한편, 심지어 한순간의 이끌림으로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러한 행동으로 ‘애순’은 상당히 여성의 삶의 남성 중심의 권위에서 능동적으로 벗어나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은 여성 자유 운동의 영향을 받은 ‘신여성’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여성의 자유로움을 미화하지는 않는다. 페니미즘적인 소재를 가져왔지만 그 표현은 전혀 페미니즘적이지 않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3인칭으로 진행되는데 가장 큰 중심은 ‘애순’이다. 애순을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그 인물의 사연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도대체 애순이 왜 저런 행동을 할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인물을 냉소적이고 이기적으로 그려낸다. 게다가 데파트에 가서 종업원에게 가게에서 가장 비싼 옷을 달라고 하는데 상당히 탐욕적인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애순과 불륜에 빠진 남자는 무장강도였으며 부잣집이라는 거짓말로 애순을 꼬신 사람이다. 애순은 점차 자신에게 무관심해진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는데, 그 관계가 얼마나 불안정한 관계였으며 충동적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또, 한번 본 공연의 무용수에게도 충동적으로 사랑에 빠지는데,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어디 하나 애순에게서는 좋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관념에게서 자유로운만큼 그만큼 자신의 행복을 쫓는데 있어서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냉혈한처럼 묘사된다. 그에 반면에 남편은 딸 정희를 걱정하고 챙기고, 딸 정희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사무친다. 상당히 인간적이고 책임감 있는, 가정의 모범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이러한 인물의 대조는 당대의 사회적인 관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영화 부제 ‘죽음의 자장가’만 보더라도 영화는 애순, 이 악녀(?)를 타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난다. 그 장면은 마지막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충동적으로 사랑에 빠진 무용수를 쫓던 애순은 택시를 타고 기차를 쫓는다. 그 와중에 속도 규칙을 위반하게 되고 딸 정희는 그 택시에 치이게 된다. 그렇게 병원으로 이송된 정희는 애순에세 ‘아무데도 가지 말어’라고 말하며 ‘그래’라고 애순은 대답한다. 그리곤 애순은 초췌해진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더니 이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이 장면에서 가장 큰 의미는 애순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정희의 등장은 애순에게 가족애를 일깨워주는 장치인데, 애순을 남편과 정희의 가족의 범주로 다시 묶는다. 마치 가족이나 과거의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어떠한 암시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가장 눈을 둬야 할 것은 애순의 모습인데, 헝클어진 머리에다가 눈물까지 흘리니 어떠한 죄인처럼 연출된다. 인물의 목적을 달성시키지 못하게함으로서 인물을 구석에까지 몰고 난 뒤에 영화는 그제서야 인물의 내면을 부각시킨다. 그 컷에서는 ‘애순’이 비극적으로 보일 정도로 인물의 처지가 부각된다.


그것이 영화가 의도하던 바가  분명하다. 여기서 영화의 시선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신여성’을 죄인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미몽>는 그러한 여성 자유운동이 가져온 여성 해방이 되려 여성의 파멸을 이끌어오게 ‘꾸밈’으로서 선동하거나 교육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현대에서는 사회적으로 납득되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당대로서는 그것이 대중적으로 납득이 된 그러한 사회상을 유추할 수 있다. 다만스토리가 매끄럽지 않고 감정선도 뚝뚝 끊겨서 미학적인 측면보다는 역사적인 사료로 본다면  더좋을 법하다. 흥미로운 점이 많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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