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한국영화 쇼크의 현장 - 씨네 21 306호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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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한국영화 쇼크의 현장 - 씨네 21 306호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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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씨네21에서 발췌한 것입니다.(http://www.cine21.co.kr)

베트남, 한국영화 쇼크의 현장

과거를 딛고 미래로 화해의 바람이 분다

■ 한국배우들 최고의 인기 구가 드라마 선풍은 패션으로 이어져

<찜>이 기록적인 흥행을 세운 나라, 영화 잡지를 펼치면 한국 배우들로 도배된 나라, 인기연예인 10명을 뽑으면 8명이 한국 배우인 나라, TV엔 한국 드라마가 쉼 없이 방영되는 나라. 한국보다 한국 배우와 한국 영화를 더 좋아하는 베트남을 찾아갔다. 30여년전, 미처 말을 걸기도 전에 적이 되어 만났으나, 이젠 영화와 드라마로 한국의 마음이 가장 깊이 전해지는 나라가 된 베트남은, 느리지만 즐겁게 영화를 알아가고 있었다.-편집자

‘깜온’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다. 유럽 선교사가 만들었다는 귁구(國語)의 알파벳 외양과 달리 ‘깜온’은 중국말 ‘감은’(感恩)에서 왔다. 웃 사람에게 ‘깜온’ 할 때 붙이는 ‘신’은 ‘심’(心)에서 왔다. 베트남은 우리에게는 미망의 나라다. 서로의 근친을 알아채기 전, 우리는 그곳에 적으로 갔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 보트 피플이 빠져나온 암흑의 나라로 우리는 베트남을 치환했다. 구경꾼이 되어 밟은 베트남, 두리안과 리찌, 쫌쫌, 망커우, 망쿳의 과육을 대하며 그새 또 과거가 잊혀진다. 이 향기 짙은 나라의 체제가 사회주의였을까. 일년에 삼모작을 해내는 땅덩어리가, 들판에 지천으로 벌어지는 열매가 그들 사회주의 혁명전쟁의 영웅이었다는 점을 뜸들여 돌이키면서, 착각은 이방인의 나라의 체질에서 왔겠거니, 한다.

한국은 베트남전에 적으로 참전했다. 한국경제인들이 가끔 베트남신문과 TV에 등장하는데, 예외없이 구타사건으로다. 현재 한국은 경제진출규모 4위에 산업재해 - 구타사건 60%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선한 웃음은 무방비로 피어난다. 그들은 코레에, 한국에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이 이유일 것이다. 베트남전 승리의 원동력 구찌터널의 기념품 상점에는 세븐 업과 코카콜라 캔으로 만든 가방이 전시되어 있다. 베트남전에서도 그랬다 한다. 미군 비행기가 추락하면 그것을 해체해서 생활물품을 만들어 썼다. 거기서 나온 링으로 반지를 만들어 끼고, 철빗을 만들어 쓰면서 그들은 그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를 졸업한 비엔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나쁜 것은 나쁜 것이고 상품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다.” 그들의 아량을 이야기하고서야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통해 묶은 상처를 치유코자
94년 10월 결성된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은 베트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진정한 친구들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진 모임이다. 젊은 작가들은 베트남에 관한 소설을 펴내고 영화를 만들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고엽제 피해에 시달리는 인물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돌아보는 이대환의 소설 <슬로우 불릿>이 그런 취지에서 올해 초 먼저 나왔다. 소설과는 별도로 모임회원들은 영화 <슬로우 불릿>의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중이다. <내일을 여는 집> <십년전>의 소설가 방현석씨가 조우필름에서 제작할 이 영화 시나리오의 대표집필가이다. 그는 취재차 여러번 베트남을 방문했고 현지인들은 ‘새로운 베트남 영화’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속 깊은 관심을 표했다. 그렇게 하여 ‘유람차’ ‘견학차’ 준비한 베트남행에 ‘…젊은 작가들의 모임’ 주최 ‘베트남 - 한국 문학인 교류의 밤’과 ‘베트남-한국 영화인 간담회’ 일정이 보태졌다. 무덥기 전 작가들과 조우필름 기획자들은 베트남을 찾았다.

6월 6일 호치민시의 훈방호텔에서 열린 한국-베트남 영화인 간담회는 예상 밖의 환영 열기로 가득했다. 원 록 쾅 해방영화사 사장, 뉴엔 반 홍 훈방대학교 총장, 팜 웅어잉 정 감독, 수어 끙 감독,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 여우상 수상자이기도 한 홍안과 팬들을 몰고다니는 인기배우 꾸 잉 건, 배우 작위를 받은 최고 배우 태안 등과 기자와 학생 등 300여명이 참석해서 좁은 행사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전날 아마라호텔에서 열린 ‘베트남-한국 문학인 교류의 밤’에서 상영된 장편다큐멘터리 <농부의 팔>의 감독 반레를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반레 감독은 자신을 꼭 시인으로 소개한다. 베트남전에 17살의 어린 나이로 참전한 그는 그 전쟁에서 시인이 되고 싶었던 친구를 잃었다. 그 친구의 이름을 따 시인이 된 그는 자신이 영화와 관련하여 소개될 때에도 ‘시인 반레’라고 한다. 올해 베트남 최고 감독상을 받은 반레 감독은 지난해 구수정 <한겨레21> 통신원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원혼의 유언>을 만들었다. 일년에 5∼7편 만들어진다는 35mm 장편영화, 그중 하나인 이 영화는 과거 베트남전의 과오를 씻기 위한 한국인의 노력을 그린 영화다. 그가 올해 완성한 <농부의 팔>은 고엽제 이후의 삶을 사진으로 찍는 일본 사진작가 다카무라 오로가 주인공이다. 그가 읊는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의 마지막은 이렇다. “문명의 시대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 중세와 다른 점은 거기에 있다. 사람을 살아 있는 상태에서 천천히 죽이는 것. 미국인들은 말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우리는 그 변화를 주시하고 경청할 것이다.”

<슬로우 불릿>은 그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미래를 만들고자 한다. 베트남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영화이고, 베트남에 사과를 구하려는 영화다. 두나라 영화인 모임에서 작가 방현석씨는 “기존의 베트남 전쟁 영화들이 자극적이었다면, 이 영화는 숙성과 곰삭힘의 미학을 담을 것이다. 충동이 아니라 깊은 곳으로부터 희망을 건져내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폭력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담뱃갑 속에 씨를 심고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사람의 식물적 저항을 그리겠다”고 밝혀 베트남 영화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호치민시에서 격주간으로 발행되는 영화잡지 <디엔 안 탄포 호치민>의 팜 투이 넌 편집장은 “전쟁의 기억과 연관된 한국인의 얼굴은 두 가지였다”고 말한다.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 두고 간 부인을 찾으러 오는 참전군인을 그린 한국영화를 본 적 있다. 낭만적 측면을 강조한 영화였는데, 그런 사람은 현실에는 많지 않다. 반면 베트남 영화에서 한국인은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을 잔인하게 살상하는 군인이었다.” <슬로우 불릿>은 그처럼 갈등하는 기억을 화해시키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베트남 기자들은 시나리오 완성 즉시 번역해달라는 부탁이 득달같다.

한국배우, 혈액형까지 궁금
어쩌면, 베트남과 한국의 화해는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베트남인들은 한국영화를, 한국배우를 사랑한다. 인편에 부탁해서 구한 것일까. 호치민시의 한 상점에 붙은 한국판 <연풍연가> 포스터에서 장동건이 행인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장동건의 <친구> 소식도 이곳 사람들에겐 이미 ‘다 아는 얘기’라 선물이 되지 않는다. 흔히 ‘시네’라고 부르는 영화잡지들이 벌써 기사화했다. 가판대의 영화잡지에서 한국배우들의 사진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격주간지 <디엔 안 키 트룽> 6월1일치에는 김호진과 이영애가 함께 실렸다. 송윤아와 안재욱, 이정재, 차인표, 오연수, 배용준 등의 사진과 송혜교, 차태현, 손지창의 프로필이, <사랑의 전설>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승연의 브로마이드가, 김소연과 원빈의 혈액형부터 신장까지 적혀 있는 팬서비스용 페이지가 있다.

TV가 오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한국드라마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걸 우리는 한국 쇼크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말로 한국에 대한 열풍을 설명할 수가 없다. 쇼크는 오래 가지 않는 것인데, 이런 쇼크가 벌써 5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일간지 <사이공 해방>의 기자 낌 엉의 말이다. 한국 텔레비전드라마는 94년 <의가형제> 이후 <모래시계> <별은 내 가슴에>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불꽃> <모델> <가을동화> <사랑해 당신을> 등이 방영됐다.한국드라마는 대략 하나씩 번갈아가며 2개 방송사의 전파를 타는데 현재 <사랑의 전설>과 <불꽃>이 방영중이다. 한국 텔레비전드라마는 방송되기만 하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다. 인기조사를 하면 10위 안에 8명의 한국배우가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알려진 대로 베트남에서 장동건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워낙 많은 드라마가 끊임없이 방영되는 것을 보고 궁금했던 것일까, 일간지 <사이공 해방>의 뉴롱 기자는 “한국에서 영화는 50편 정도 제작되는데 드라마는 도대체 얼마나 제작되느냐“고 묻는다. 미니시리즈에 주말연속극에 일일드라마에 아침드라마에 주간드라마까지 3개 방송사가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으니, 베트남에서 한국드라마 쇼크는 오래 지속될 것 같다.

한국드라마는 베트남에 ‘패션’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토마토> 방송 뒤 하노이에는 김희선이 들고다니던 요요와 함께 바바리가 유행했다. 짧은 봄과 가을, 입을 리 없는 바바리를 그들은 샀다. 미용실에는 한국배우들이 걸려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키며 저렇게 해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머리에 색깔을 들인 사람 또한 뜨문뜨문 보인다.

50이 넘은 베트남 최고의 배우인 태안은 한국배우의 연기에 매료되었다. 태안은 <인도차이나>에 출연한 배우이자 호치민시 영화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태안은 장동건이 베트남에 왔을 때 호텔에 몰려든 인파에 자신도 섞여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한국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진심으로 감복한다. 너무 아름답고 재능있다”고 소감을 덧붙인다.

팜 투이 년은 이런 한국드라마의 인기 비결을 “전통과 종교가 비슷한 문화적 배경”에서 찾는다. “유럽이나 미국의 드라마와 달리 한국드라마에는 가족과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유교적 영향이 배어 있다. 한국드라마는 정절과 인간애, 우정 등을 중요시한다. 그것은 아시아 사람들의 주요한 특징이다. 20년 전에는 홍콩과 대만의 드라마 역시 그런 배경 아래 베트남 관객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보면 그들은 자기 나라 드라마인 듯 편안함을 느낀다. 거기다가 한국드라마는 캐스팅에 주력한다. 연기도 잘하지만 잘생긴 배우들이 많다. 다른 인기 요소로는 매력적인 줄거리와 아름다운 영상 그리고 훌륭한 음향효과와 음악을 들 수 있을 듯하다.”

텔레비전에서 발생한 스타파워는 드디어 극장으로까지 전염됐다. 최근의 사례는 <찜>의 개봉이다. <찜>은 <마음을 다 바친 사랑>이란 제목으로 900석 규모의 하노이 탕탄극장에서 지난 3월1일부터 4월15일까지 한달 반이나 상영되었다. 베트남 극장가에서는 보기드문 장기상영이었다. <`Forever`>라는 노래로 몇달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안재욱이 출연한 탓도 있지만, 파 투이 년 편집장은 “<찜>이 경쾌한 영화였던 것이 히트요인인 것 같다”고 분석한다. TV드라마 <가을동화>에 비판적인 견해를 썼다가 독자의 엄청난 항의를 받기도 했다는 그는 <찜>에서 한국 주류영화 이야기구조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한국에는 주인공이 극의 끝에 병에 걸려 죽고, 사랑하는 남녀가 울리기 위한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고전적인 영화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찜>은 달랐다.”이 인기에 힘입어 김혜수가 출연한 1991년 작품 <잃어버린 너>가 호치민시의 탕농극장에서 지각 개봉하기도 했다.

그들만의 ‘씨네’, 그들만의 극장
베트남에서 ‘씨네’라는 말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칭한다. 영화사 또한 영화와 TV드라마, CF를 함께 만든다. 우리가 영화하면 떠올리는 35mm영화는 베트남 문화사업국의 지원으로 일년에 6∼7편 정도 만들어진다. 연간 1~2편 씩 만들어내는 남쪽 호치민 해방영화사와 북쪽 하노이의 베트남영화사가 가장 큰 규모의 영화사다.

베트남에서는 “극장 가자”는 한마디에 뺨을 맞을 수도 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책임지겠다는 동의가 이루어졌을 때야 맘먹고 하는 제안이다. 몇몇 극장은 두 가지 좌석이 구분되는데, 그들 사이의 애정을 돈독히 하는 행위의 ‘편함’과 ‘불편함’이 기준이다. 붕타우에서 만난 팅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해서 떠듬떠듬이나마 통역 없이 나눴던 유일한 대화의 주인공. “극장에 자주 가느냐”는 말에 머쓱한 웃음을 먼저 짓더니, “자주 가지는 않는다”며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덧붙인다. “극장에선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방해받지 않고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극장은 그렇게 ‘은밀함’을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7개의 스크린이 있는 ‘멀티플렉스’ 호치민의 탕송난극장 앞에서 사진을 찍자 둘씩 짝지은 연인들이 기둥 뒤로 숨고 앵글 밖으로 밀려나며 쭈뼛거린다. 결국 극장 관리인이 나왔다. “여기서는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 그것이 규칙이다.” 이 멀티플렉스는 한 극장에 50개의 좌석이 있는데 모두 비디오로 상영되고 있다.베트남은 비디오나 CD로 영화가 수입된다. 호치민 9개 대극장 중 탕농극장만 프린트 상영을 한다. 국영배급사(fafilm, Film Distributing Center)도 비디오 배급에 주력한다. 그외에도 개인적으로 수입되고 유통되는 시장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타이타닉> 같은 경우도 비디오로 돌았다.

비디오가 필름을 대체한다는 것이 베트남영화의 열악한 환경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돌아오는 대답은 담담했다. “비디오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베트남의 모든 극장에서도 35mm 영사기를 사용했다. 80년대 초반 베트남 영화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대만과 홍콩영화가 비디오로 보급되었고, 사회주의권 영화를 주로 수입하던 국영배급사 또한 필름을 수입하지 않았다. 영사기는 지금도 극장에 남아 있다. 더 훌륭한 화질의 영화를 필름으로 상영할 필요가 생기면, 이 극장들도 좀더 훌륭한 영사기를 구비하게 될 것이다.” 판 투이 년은 비디오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극장에서 필름을 틀 수밖에 없었지만 비디오라는 싼 매체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필름을 굳이 틀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이것도 사회주의이념의 한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적은 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비디오는 더 혁명적이라고. 그것이 비록 화질이 필름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캄보디아 전쟁과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극도의 빈곤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값싼 비디오는 영화에 대한 베트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유용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86년 베트남식 개방정책 도이모이가 시작된 이후, 부분적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경제개발이 추진되면서 제대로 된 영상시스템과 음향설비를 갖춘 극장이 생겨났다. 하노이의 국가영화상영센터(1200석)와 탕탄극장이 그것이다. 이익이 난다고 판단이 되는 영화는 프린트로 수입해서 이곳에서 상영한다. <찜>도 그런 영화였다. 호치민시의 탕농극장 역시 필름상영극장이다. 여기서 필름으로 상영된 <미이라2>는 일주일 만에 2500명의 관객을 동원해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영화가 되었다. 이제 이 흥행기록은 수시로 깨질 것이다.

베트남 영화산업은 출발선에 있다. 베트남 영화는 아직 극장과 관객의 갈증을 채워줄 수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래서, 베트남 영화인들은 그들 영화의 미래를 묻자, 대답을 하기에 앞서 한국 스크린쿼터의 비결부터 묻는다. 충무로는, 여의도는 베트남의 할리우드가 될 것인가, 한국영화열풍으로 먼저 다가온 그들과 진정한 화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연대를 모색할 것인가. 오늘의 베트남은 그런 질문 하나를 한국영화를 향해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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