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제5종 보급품은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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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제5종 보급품은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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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대한민국 육군 특수위안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한의 인민군은 빠르게 남한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같은 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국군과 연합군은 북한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1950년 12월부터 1951년 초 사이, 북한이 서울을 재점령하는 1.4 후퇴가 있었다. 1951년 3월에는 남한이 서울을 재탈환하고 전쟁은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되었다. 이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전쟁 전체 기간의 2/3가량을 차지하는 이 기간 동안 전선에서는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대한민국 육군 본부는 한국군 위안부, 즉 ‘특수위안대’를 설치했다. 이 특수위안대는 휴전 이후인 1954년 3월에야 폐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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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시기가 2011년에 개봉한 장훈 감독의 영화 <고지전>의 배경.
294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 속에 묘사된 참담함을 기억할지는 모르겠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난 1956년, 육군본부는 <후방전사(인사편)>이라는 책을 낸다. 책의 서언에는 이후 군대에 대한 후방 지원 업무를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고자 함을 출간 목적으로 밝힌다. 바로 이 책에 특수위안대에 대한 내용이 밝혀져 있다. 이는 특수위안대가 한국전쟁기 군인에 대한 후방 지원을 목적으로한 군대 시설의 하나이며, 국가에 의해 창설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 설치의 배경 및 목적을 보자.

 

면화한 이유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 이라고 단안하면 별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래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 특수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육군본부, <후방전사>, 1956:148 

 

그러니까, 군인들의 사기를 고취하고 성욕을 분출하지 못하는 데에서 야기되는 지장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설치한 것이 바로 특수위안대였다는 것. 남성의 성욕은 스스로 절제할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여성을 그 분출구로 보는 시선은 사실 2016년 오늘날의 일상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인지라 너무나도 놀랍지 않은 것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중략)

 

육군본부의 <후방전사>에는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가 수록되어 있다. 서울의 세 개 특수위안대 소대와 강릉의 한 개 소대의 ‘실적’을 월별로 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실적이란 ‘피위안자’의 수로 대표된다. 피위안자라 함은 위안부로부터 위로와 안녕을 구한 이들을 말한다. 즉, 위안부를 통하여 성욕을 해소한 군인들 되겠다.

 

처음 이 표를 보았을 때, '실적'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았다면 특수위안대 따위 설치하지도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잇따랐다. 사실,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제5종 보급품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보급품’. 

 

연대 1과에서 중대별 제5종 보급품 수령지시가 있어 가 보았더니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되어 왔다. 

김희오, <인간의 향기: 자유민주/대공투쟁과 함께한 인생역정>, 원민, 2000, p70

 

다시 통계로 돌아가서.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에 따르면 그 해 서울의 세 개 소대 특수위안대와 강릉의 한 개 특수위안대에 속한 위안부들이 20만 명이 넘는 군인을 상대했다. 위안부 한 명이 하루에 평균 6명 이상과 성행위를 하도록 강요받았던 것이다. 다만 여기 나타나는 ‘실적’은 4개 위안대에 직접 출입한 군인들의 통계인지, 전선 부대에 출장을 간 위안대를 이용한 군인들의 통계까지 포함하는지는 불명확하다. 따라서 하루 평균 피위안자의 수가 더 많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겠다.

 

(후략)

 

해당 기사 링크 http://www.ddanzi.com/ddanziNews/115044941 

 

 

 

끔찍하지만 한국군도 전쟁 중 위안부 부대를 공식 운영했던 사실이 공문서로 다 남아 있네요.

요즘 여러가지 논란도 많고... 참 혼란스러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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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Comments
14 소맥  
참.,당혹스럽네.....왜 이리 가슴이 아프죠.
24 cinegaze  
그러게요, 저도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ㅠㅠ
26 naiman  
음....마음이 무겁네요.
24 cinegaze  
네... ㅠㅠ
29 슐츠  
당시 포로로 잡힌 인민군 간호사들이나 여군들이
강제로 위안부로 도원되었다는 글을 본적이 있네요
24 cinegaze  
아, 명백한 제네바 협정 위반이었던 거군요. ㅠㅠ

추카추카 41 Lucky Point!

41 나무꾼선배  
전쟁이라는 광기는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24 cinegaze  
그러게 말입니다 ㅠㅠ
S 영화이야기  
6.25 전쟁 당시 저런 일은 아마도 비일비제 했을 겁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군요.
24 cinegaze  
네, 두번 다시 없어야 될 일입니다. ㅠㅠ
29 써니04™  
일본도 문제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지원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이상한 인간들도 많습니다.
내부자들이 더 큰 문제;;
24 cinegaze  
맞습니다. 비판을 통해 사회가 건강해지는 건데 비판 자체를 왜곡하고 백안시하는 분위기가 걱정스럽습니다. ㅠㅠ
S 칸나비스  
일본이었다면 아직까지 용서가 안되었을 일이 한민족이라 침묵하게 만들었을까요?
처음 알았던 사실이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24 cinegaze  
개인이든 사회든 타인에게 들이대는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해야 발전이 있겠죠. ^^
28 악바리의웃음  
처음 알았던 내용입니다. 좀더 확실한 내용을 알아봐야 겠군요.
24 cinegaze  
네, 저도 관련 논문 등 더 읽어볼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