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르와 고다르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일화

영화이야기

로메르와 고다르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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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 바그 멤버 중에 가장 수수께끼에 쌓여 있는 인물은 에릭 로메르입니다.

1920년생으로 멤버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았지만(이탈리아의 페데리코 펠리니와 동년배!) 감독 데뷔가 가장 늦었던 인물이라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6년간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으로 있다가 혁신을 내세우는 자크 리베트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감독 데뷔 이후에도 최소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다 보니 자가용 없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녔을 정도로 검소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군더더기 하나 없이 담백한 카메라 움직임과 편집으로 이루어진 그의 영화는 로메르의 검소한 생활을 닮았습니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여 사생활을 일체 드러내지 않았기에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그의 장례식 때 아내와 자식을 처음 봤다고 합니다.  



베일에 쌓인 사생활 때문인지 로메르에 대한 믿기 힘든 에피소드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고다르와 관련이 있는 에피소드를 한번 소개할까 합니다.


로메르는 누벨바그 감독 중 누구보다 지적인 감독이었습니다.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늘 책을 곁에 두고 읽고 있었으며 고전시를 암송하는 버릇을 지니고 있었지요.

'무르나우의 <파우스트>론'으로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근엄하고 진실한 문학교수의 면모를 가지고 있던 인물입니다(실제 소설도 몇편 썼습니다).

영화감독이라는 수치스런 직업을 선택한 것을 차마 연로한 노모에게 알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저명한 감독으로 알려지고 나서도 자신의 얼굴이 신문잡지에 발표되는 것에 상당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로메르의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아들이 영화 감독인지 모르는 채로 세상을 살다 갔습니다. 


영화 감독 데뷔 전에 장 뤽 고다르는 로메르의 집에 수시로 들락거렸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로메르가 학교에 나간 틈을 타서 고다르가 그의 서재에 있는 희귀본을 훔쳐 고서점에 팔아 넘긴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부언을 한다면, 고다르나 프랑수아 트뤼포는 어릴 때부터 유명한 도둑놈들이었습니다.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보면 앙트완느가 계부의 사무실을 찾아가 타이프라이터를 훔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그냥 나온게 아니라 경험담인 거죠.

그들은 훔친 물건을 팔아서 히치콕이나 하워드 혹스의 영화를 보며 자랐습니다.


고다르만큼이나 난해한 영화를 만들었던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에 부부도 유명한 도둑 부부입니다.

영화 만들 때 소품들을 길에서 슬쩍해왔다고 인터뷰 도중에 킬킬거리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합니다.

벨기에 출신의 여성 감독 샹탈 아커만도 필름을 훔쳐서 영화를 찍었고요.


그런데 유럽에서는 이런 도둑질에 약간의 낭만성(?)을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도둑 일기>의 작가 장 주네는 평생을 도둑질로 살았던 인물인데 서구 예술가들에게 숭배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사실, 예술이라는게 생각만큼 고고하고 준엄한게 아닙니다.

예술가로 살기엔 배가 너무 고프니까 이것 저것 남의 것을 가져오는 것이지요.

그러고보면 영화가 가장 도둑질의 예술입니다.

기존의 예술, 즉 소설에서 플롯을 훔쳐오고, 미술에서 구도를 훔쳐오며, 연극에서 연기를, 음악에서 사운드와 리듬을 훔쳐온 도둑놈의 예술이 영화인 것이지요.  


고다르가 후기에 만든 에세이류 영화들을 보십시오. 여러 영화 속의 장면들을 여기저기서 가져와서 우격다짐의 주장을 전개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미지들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고다르 자신도 모르겠다고 할 지경입니다.


2005년에 프랑스 온라인 저작권에 반대를 하며 고다르가 불법 다운으로 기소된 남자를 구제하기 위해 1천 유로를 기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남자에게 무죄를 주장하며 고다르는 '저작권을 위반하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런 말로 변호를 합니다.

'예술가에게 권리란 없다. 의무만 있을 뿐이다'. '문화유산은 공유되어야 한다'.

도둑질로 통하는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아는 것이고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고다르는 도둑질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할까요. 


에릭 로메르와 고다르의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다 곁가지로 많이 빠졌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도둑질이 크게는 영화라는 예술, 작게는 고다르의 작품과 참 잘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고서점에 들런 로메르는 거기서 자신의 서재에 있던 희귀본을 발견합니다.

한 순간에 모든 상황을 파악한 그는 책값을 전부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다음 날, 로메르의 서재에 들른 고다르는 뻔뻔스럽게 서재의 책장을 둘러봅니다.

희귀본들이 어떤 변화도 없이 책장에 꽂혀있는데 고다르와 로메르는 아무 말도 없이 침묵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방약무인한 고다르와 아무 말없이 회피하는 로메르.

그것은 죄의 고백과 사면이라는 프랑스 카톨릭적인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이 프로테스탄트적인 침묵으로 대결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고다르 영화의 우격다짐 내지는 후안무치함에 비해, 드러내지 않고 한발 물러서서 회피하는 듯한 로메르의 영화. 



원래 이 글은 에릭 로메르의 <보름달이 뜨는 밤>에 대한 소감을 쓰려다가 길어져서 잠깐 여기에서 멈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본래 글을 써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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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Comments
21 前中後  
읽었습니다. 그런 일화가 있었네요
고서 책값을 지불했다니 역시 부르주아는 다르네요
13 소서러  
방약무인한 고다르와 아무 말없이 회피하는 로메르...ㅋㅋㅋ^^
영화를 보면서 어느 정도 이러시지 않을까했던 이미지라서 살짝 실소가 나왔네요.
다만, 고다르 옹은 오만가지 생각이 가득 차서 본인 뇌를 10% 이상으로
사용할만큼 장광설 수다쟁이실 줄 알았는데 의외인 면모도 있네요

몇 년전에 본, 아직도 기억나는 알모도바르 감독님의 가르침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문제에 관대한 해결책을 다른 사람의 영화에서 찾고 그 영향이
본인 영화에서 살아날 때만 모방은 유용하다. 존경심에서 '빌리는 것'이라면
해결책을 찾기 위한 의도는 '훔치는 것'이며 훔치는 것만이 정당하다.
필요하다면 결코 망설이지 말라. 모든 영화감독들은 훔친다."
14 Harrum  
고다르 형, 역시 난놈은 달라요~ ㅎㅎㅎ
귀여우심~
20 암수  
고다르와 트뤼포는 철천지 웬수지간으로 유명했죠...
20 암수  
고다르 영화는 갈수록 괴팍해져서 ㅎㅎ...
"필름소셜리즘"을 로저 에버트옹이 보시다가 뛰쳐나갔다는...
그리고 혹평을 한번 하셨죠...

개인적으론 로메르영화를 좋아합니다... 알콩달콩 소소한 재미가 있어요...
특히 그의 80년대 영화가 소소한 보는 재미가 가장 좋더군요....<나무.시장,메디아테크 93>는 한번 한글번역본을 보고잡네용...
20 큰바구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14 푸른눈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2 시간의항해  
고다르가 그 고서를 다시 훔쳐 팔아먹었으면 레전든데
트뤼포의 [사랑의 묵시록]에서도 영화 포스터를 훔치는 장면이 있었죠? 비록 꿈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34 금옥  
몇번이나 읽어보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
17 달새울음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1 레오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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