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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이 장면을 비교해서 보세요 - <파리 텍사스>, <러스티 맨>

최근에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1984)를 다시 보다가 낯익은 장면을 찾았습니다.

영화 중반부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이 밤거리를 걸어가는 신입니다(링크 걸어 놓은 첫 번째 동영상 참조).


헤어진 아내를 찾으러 먼 거리를 쫓아 왔지만 그녀의 행적에 실망한 남자가 아들과 걸어갈 때, 밤거리에 신문지가 날립니다.

서부 영화에 자주 보이는 회전초(Tumbleweed)처럼 보이는 이 종이 조각들은 남자의 스산한 마음을 대신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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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에서 갑자기 떠올랐던게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러스티 맨>(1952)이었습니다. 

빔 벤더스는 니콜라스 레이를 정신적 아버지로 생각했을 만큼 그를 추종했습니다.

레이 감독을 배우로 픽업해서 <미국인 친구>(1977)를 찍었고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물 위의 번개>(1980)를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러스티 맨>의 앞 부분에 시합이 끝난 로데오 경기장을 가로질러 가는 사내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 남자는 경기중 낙마를 해서 다리를 절룩이며 걷고 있지요(두 번째 동영상 참조).

인생의 한순간에 미쳐 손 쓸 겨를도 없이 된통 당한 것이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 살다 보면 겪게 되는 일일 겁니다.  

남자의 육체적, 정신적 아픔을 이 영화에서는 흩날리는 종이와 흙먼지로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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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날리는 신문지와 바람을 한번 보십시오.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쇼트입니다.  

벤더스는 이 멋진 장면을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파리, 텍사스>에서 차용하면서 선배 감독에 대한 존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동영상으로 링크 해놓은 <러스티 맨>에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로데오 경기장을 나온 사내가 트럭을 빌려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상처 받은 이 남자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고향집. 남자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집으로 다가갑니다.

문이 닫혀 있어 집 뒤편으로 돌아온 남자는 집 아래로 기어들어가게 되지요.

거기서 어린 시절 자신이 숨겨놓은 물건들을 끄집어 내고 잠시 추억에 잠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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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영화 중에 가장 멜랑콜리하다는 평을 받는 이유가 이 장면 때문입니다.

떠나온 집과 잊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빔 벤더스의 영화에서도 이런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도시의 앨리스>(1973)는 우연히 어린 소녀를 떠맡게 된 남자가 소녀와 함께 그녀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사진 속의 집을 더듬어 찾아가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은 소녀가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파리, 텍사스>에서 남자가 찾는 장소도 사진 속에는 존재하지만 사라진 노스텔지어의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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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티 맨>은 로데오 경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로데오에 대한 찬사라기 보다는 그 경기가 가지는 폭력성, 일회성, 도박성을 비판한 영화지요. 

루벤 마물리안의 <피와 모래>(1941)가 투우를, 로버트 와이즈의 <셋 업>(1949)이 권투 경기를 통해 황폐한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로데오라는 것이 (이 영화를 시네스트에 번역해 올려주신 umma님의 소개대로) 1869년에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동시에 1869년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대륙횡단 철도가 처음 완공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기차의 등장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서부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려고 할 때, 거기에 대한 저항이라도 하듯이 가장 서부적인 모습의 오락거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러스티 맨>에는 이런 이상한 불균형이 언듯언듯 비칩니다.

아서 캐네디와 수전 헤이워드가 연기하는 부부는 농장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서 집을 사는 것이 꿈입니다. 이들 부부에게 나타난 남자가 퇴물 로데오 선수 로버트 미첨입니다.

안락을 추구하는 부부에게 욕정(lust)을 눈뜨게 하는 디오니소스적 캐릭터입니다.


<러스티 맨>은 장르적으로도 기존에 봐왔던 온전한 서부극이 아닙니다.

이 영화가 서부극이다, 아니다라는 것은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부터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결국 세미-서부극, 서부극의 옷을 입은 영화라는 평가가 나왔지요.

그러니까 로데오의 등장 시기라는 시대적 불균형, 영화 속의 인물간의 불균령, 장르적 불균형이 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영화입니다.


사실, 니콜라스 레이는 정통적인 영화를 찍는 감독은 아닙니다.

영화의 소재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니콜라스 레이 영화의 앵글은 혼란스러울 만큼 기울어진 앵글을 많이 사용하지요.

그러니까 그의 영화가 장르적으로도 낯설지만 형식적으로도 기존 영화와 차별을 가져옵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자면 아마 애꾸눈 감독이라는게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할리우드의 여섯 명의 애꾸 감독들(프리츠 랑, 존 포드, 라울 월쉬, 택스 애버리, 앙드레 드 토소, 그리고 니콜라스 레이)은 하나 같이 개성 만점의 영화 감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울어진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 본 감독이 니콜라스 레이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불화와 자기 파괴가 이 감독의 영화에 넘쳐나는 것도 이런 이유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되시면 umma님 번역으로 시네스트에 있는 <러스티 맨>을 꼭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이 영화는 그럴 가치가 있는 걸작이기 때문입니다.


<러스티 맨> 자막 :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1508457&sfl=wr_subject&stx=%EB%9F%AC%EC%8A%A4%ED%8B%B0+%EB%A7%A8&sop=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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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Comments
20 암수  
좋은 글입니다....추천합니다...
2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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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큰바구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14 Harrum  
영상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아픔이 시계님 글에서도 느껴지네요

영화보다 글이 더 끌려요..
삐끼 제왕급.
아, 한 분 더 계시네요, ㅅㄴ님이라고...    :-)
시네스트에서 제 임무는 올라와 있는 보석 같은 영화를 여러 사람이 보게 만드는 겁니다.
제 글을 읽고 소개된 영화를 본다면 삐끼 제왕이라는 명칭은 큰 영광입니다. (_ _)
14 스눞  
얼마 전 뒤늦게 하스미 님의 '아버지가 (함께 걷고) 있었다' 글을 읽고 큰 감흥을 느꼈습니다.
댓글을 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꼼꼼하고 정성껏 댓글을 달 수 없는 상황이라 나중으로 미루었네요.

글 머리에 제 닉네임을 언급해주셔서 몹시 반갑고 감사했고요.

그 글과 함께 이번 글 역시 하스미 님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사명(좋은 영화를 여러분들이 보게 만들겠다는)이 듬뿍 느껴져서 몹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만큼 많이 아는 분이시기에 영화 청맹과니인 제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큼 박식과 혜안이 빛나는 글이기도 했고요(아는 만큼 보이나니~ ㅎ).

지난 번의 '아버지가 (함께 걷고) 있었다' 글과 이 글을 함께 읽고, <파리 텍사스>와 <러스티 맨>을 다시 보려 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멋진 영화를 한글 자막과 함께 볼 수 있도록 늘 애써주시는 Umma 님께도 다시 한 번 존경과 감사를 담아 인사를 하고 싶어지네요.

하스미 님 새 글 업데이트를 고대하는 씨네스트 애독자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무더위에 지치지 마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_^

-

글 말미에 언급하신 여섯 명의 '애꾸 감독들' 영화를 몽땅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ㅋ
공들여 글을 썼는데 아무 반응이 없을 때만큼 허탈한 것도 없습니다^^
스눞님의 힘이 되는 댓글 감사합니다.(_ _)
14 스눞  
그 기분 저도 '쫌' 압니다. ㅋ 그럼요.
공들여 글 쓰셨을 때 바로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ㅎㅎ
20 암수  
6명의 애꾸 감독들 중 실제 애꾸이신 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당시 유행하던 한쪽눈에 돋보기같은 안경알 혹은 안대를 쓰던 스타일리쉬 차원인 감독들이 많을 듯 한데...
니콜라스 레이 감독은 일단 두눈이 멀쩡하신걸로 검색이 됩니다...
40~50년대 유행하던 필름 누아르식 범죄영화 영향인듯..스타일상 안대를 하신듯하고...
프리츠랑 감독은 노년인 60년 정도에 실제 눈이 멀었고...그이전에는 괜찮으셨던 듯 하고요...
거장 라울 월쉬 감독은 1929년 <올드 아리조나>촬영당시 실명하여 실제 검은 안대를 착용한 애꾸눈 감독으로 유명하셨고...
앙드레 드 토소 감독과 전설적인 애니메이션 감독 텍스 애버리의 경우는 잘 모르것네용...
20 큰바구  
스눞님도 요즘 잠수타시네요 ㅋㅋㅋ
20 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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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큰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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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스눞  
어쩐지 이상하게 귀가 가렵더라니.... ^__^
Harrum 님과 큰바구 님이 제 얘길 하고 계셨군요!!

잠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요즘 개인적인 일 때문에 도통 씨네스트에 와서 놀지를 못하네요.
출석 체크만 하고 가끔 '피핑 톰'이 되어 제가 좋아하는 분들 글을 몰래 훔쳐보다 갑니다. ㅎ

저를 감히 씨네스트 '삐끼의 제왕'님(응?)과 함께 언급해 주시다니요.
저는 그럴 주제가 못 됩니다. ㅋ

아무튼 요즘도 열심히 작업해 소개해주시는 단편 영화 자막은 열심히 받고 있습니다.
감사와 감상의 댓글은 몰아서 달도록 할게요! ^_^
14 Harrum  
저는 단지 '그런 자가 있더라'고 말만 흘렸는데
암수님과 바구님 두 분이 밀어를 나누셨죠..

바쁘면 피....톰하기도 벅찰 때가 많아요.
(피....톰해서 벅찬 건 아닙니다!)
혹시 호환마마 시절 영상 복제에 불붙으신 건 아니시겠죠?
14 스눞  
그러게요. 두 분은 대체 무슨 밀어를(응? ㅋ) 나누셨을까요? ㅋㅋㅋ
아닙니다. 호환마마 시절 영상 복제도 <자연의 아이들> 이후 두어 편 더 하고 올 스톱된 상황입니다.
오죽했으면 Harrum 님 이메일에 아직도 답장을 못 드렸을까요. ㅠㅜ
정성껏 보내주신 글이라 나도 제대로 답장해 드려야지! 하다가 시기 놓치고 이러고 있다는 ㅋ
20 암수  
스눞님은 공사다망하셔서 뜸하시다고 하더라구요...
가끔식은 댓글러로..요즘도...보이시더군요...

요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큰바구님이 스눞님의 근황을 궁금해하셔서...
13 소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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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소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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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금옥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2 유나시세  
좋은 글 감사합니다
24 umma55  
삐끼질 감사합니다.
저도 로디오장에서 쓸쓸히 퇴장하는 장면, 참 좋았습니다.
먼지와 날리는 휴지의 이미지....

고향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울타리에 잠시 앉아서 망설이는 모습도 좋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