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함께 걷고) 있었다

영화이야기

아버지가 (함께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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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네스트 자유게시판에 빔 벤더스 감독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벤더스 영화 몇 편을 추천하는데 열혈 시네스트 스눞님이 <파리, 텍사스>를 언급하지 않은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 지적에 지금 보면 그 당시 좋았던 감정을 다칠지 몰라 판단을 유보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렸습니다

<파리, 텍사스>는 처음 개봉할 때 세 번 연속으로 본 영화여서 제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수십 년만에 다시보니 명불허전이었습니다.


빔 벤더스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다큐 <도쿄가>를 일본에서 찍을 때 오즈의 전속 촬영감독인 아츠다 유하루를 만납니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아츠다가 벤더스에게 '당신의 영화 <파리, 텍사스>를 봤을 때, 당신이 오즈 감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영화의 한 장면은 오즈에게 바친 것 같더군요'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파리, 텍사스>를 다시 볼때 오즈적인 부분에 유의해서 봤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자식이 나란히 걷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보잘 것 없이 길기만 한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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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어쩌다 교토를 가게 되었다.

한일 간의 관계가 극도로 나빠진 시점에 일본 방문은 무리수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친척이 공들여 진행한 초청에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목적지가 교토라는 점도 방문을 추진한 이유다.


오즈 야스지로가 <늦봄>(1949)에서 딸과 아버지의 이별 여행지로 선택한 곳.

내가 영화를 보면서 유일하게 가보고 싶었던 그 장소.

교토의 기요미즈테라와 료안지에서 인물들이 서있던 장소를 찾아다녔다.


오즈는 하필이면 왜 이곳을 선택했을까?

멍하니 절의 정원을 거닐다가 불현듯 부녀 사이의 거리를 찍기 위해 여기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딸 사이의 거리.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자리이다.

친근한 것 같으면서도 낯선 관계.

모녀 사이의 관계와는 다른, 부모 자식이면서도 남자와 여자와의 거리.

그것이 부녀 사이의 거리다.   


<늦봄>은 오즈 영화의 익숙한 주제인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와의 거리를 다루고 있다.

노리코는 홀아비인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과년한 처녀다.

자신이 결혼을 하면 아버지 홀로 생활해야하기에 여태 노처녀로 생활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고모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아버지를 먼저 재혼시키고 노리코가 결혼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라고.  


(能) 연극을 보러 간 날, 노리코는 아버지와 맞선을 본 중년의 여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 물러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면서 묘한 질투심이 생긴다.


이 장면은 연극을 보고 나온 뒤부터 시작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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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가 그늘을 만드는 길을 부녀가 나란히 걷고 있다.

아버지는 연극의 장면이 재미나서 딸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노리코의 얼굴은 굳어있고 몸은 위축되어 있다.  


오즈 야스지로는 실내 촬영을 선호했기에 일본 타다미 가옥에 맞는 쇼트를 개발했다.

이른바 타다미 쇼트라고 불리는 그의 시그니처는 50미리 표준 렌즈에 로우 앵글 고정 쇼트였다.

특히 후기 영화로 갈수록 그의 영화는 완벽한 형식미를 갖추는데 카메라의 움직임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이 신은 오즈의 후기 영화에서 예외적이라 할만큼 움직임이 많다.

심지어 부녀의 걸음 걸이에 맞추어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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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영화에서 가장 차가운 노리코의 얼굴이 바스트 샷으로 등장한다. 

노리코는 아버지의 말을 끊고 다른 곳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언제 올거냐고 묻자 모른다고 외면한체 건너편으로 황급히 걸어가는 노리코.

오즈는 여기서 부녀의 표정을 지워버리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비춘다.

아버지의 구부정한 걸음걸이와 딸의 화가난 듯 힘찬 걸음걸이가 인물의 표정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의 속도는 다르다.

이제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것.


이 신보다 앞서 아버지의 제자와 노리코가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장면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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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가 자전거를 타고 나란히 가는 모습은 아버지와 딸의 걸음걸이와 다르다.

서로 웃으며 쳐다보는 눈길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물론 이 남자가 노리코의 결혼 상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하지만 젊음은 젊음의 속도가 있는 것이다.

그 속도가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혀놓는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1984)에서 집을 나간 트래비스가 4년만에 돌아온다.

그 사이 아들은 트래비스의 동생, 즉 삼촌을 아버지로 숙모를 어머니로 부르고 생활하고 있다.

아버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아들의 하교길에 마중나간 트래비스.

부자의 서먹서먹한 관계가 극복되는 과정을 벤더스는 <늦봄>의 부녀간의 걸음을 응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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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의 복장은 <늦봄>의 아버지 류치슈의 복장과 흡사한 복고풍의 신사복이다.

아버지는 맞은 편 거리에서 아들의 속도에 천천히 맞추어서 판토마임과 같은 걸음걸이를 선보인다.

아들도 웃으면서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따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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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갑자기 뒤로 걷자 아들도 따라서 뒤로 걷고 아버지가 쓰레기통에 부딪혀 비틀대자 아들도 비틀댄다.

여기서 <늦봄> 외에 떠오르는 영화가 빔 벤더스 자신의 영화 <시간의 흐름 속에서>(1976)이다.

영화는 동독과 서독의 접경지대를 따라 영사기를 고쳐주러 다니는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 중반에 영사기가 고장이 나서 영화를 틀 수 없게 되자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커튼 뒤에서 그림자 연극으로 아이들을 즐겁게 만든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가 영화 이전의 그림자 연극으로 돌아가서 아이들을 즐겁게 해준다면, <파리, 텍사스>는 판토마임이나 무성영화의 순수 세계로 돌아가 아들을 웃게 만든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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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의 세월과 부자의 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흉내내기로 좁혀지고 길 건너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가와 같이 걸으면서 마무리 된다.

두 사람이 걷는 오르막길에 붉은 노을이 걸려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파리, 텍사스>에서 흉내내기는 부전자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텐데, 부전자전의 영어식 표현 like father, like son이 하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의 영어 제목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만들 때 분명 <늦봄>과 <파리, 텍사스>를 다 봤다.

그는 <늦봄>에서 부녀의 불화를, <파리, 텍사스>에서 부자의 화해를 가져와 하나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바뀐 두 가족의 이야기다.

한 가족의 아이는 부유롭지만 인간미가 없는 아버지 밑에서 살아가고 다른 아이는 가난하지만 다정다감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 바뀐 아이들이 원래 가족을 찾아가지만 잘사는 집 아버지가 여태 키워 온 아들(케이타)을 보고 싶어서 가난한 집을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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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가난한 집에 들어서자 아들이 외면하고 도망친다. 

아버지는 지금껏 아이에게 성공하기 위해서 경쟁하는 방법을 강요했고 그것을 아이는 쉽게 수용하지 못했다.

자신의 잘못을 뒤늦게 깨달은 아버지는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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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의 시장통 길을 나와서 한참을 쫒고 쫓아가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을 나란히 걷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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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윗길로 아버지는 아랫길로 걸으가면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아버지가 애원하다시피 울부짖지만 아들은 외면한다.

카메라는 부자를 번갈아 보여주지만 나무와 난간이라는 방해물은 두 사람의 대화가 쉽게 통하지 않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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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유심히 봐야할 것은 아버지가 있는 낮은 길과 아들이 있는 윗길의 대조다.

아버지는 아이의 눈높이 보다 자신을 낮출 때 아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결국 아버지의 진심을 담은 사과에 아들은 설복한다.

두 사람이 걷던 길은 마지막에 합류하게 되어 있다.

길의 형태와 그 길에 맞춘 인물과 카메라의 동선이 이 신을 마무리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세 편의 영화에서 부자의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만 부녀의 관계는 신에서는 마무리 되지 못하고 있다.

그건 아마도 실제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그것보다 쉽지 않은 것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아버지와 나란히 걸었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늘 저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사람.

그 사람이 아버지였던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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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7 달새울음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할따름입니다. (_ _)
7 달새울음  
옛날에 스테판 샤프의 '영화구조의 미학'이란 책을 재밌게 읽었었는데
사진까지 첨부하며 요즘은 보기 힘든 미장센적인 분석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마지막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장면을 이끌어내는 부분이 멋지십니다 ^^
그 오래된 책을 읽어셨군요. ㅎ
<전함 포템킨>의 콘티를 가져와서 설명하던 부분이 기억나네요. 집에 어느 곳에 꽂혀 있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