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니오 모리코네와 비틀즈

영화이야기

엔니오 모리코네와 비틀즈

이달 초에 엔니오 모리코네의 부음을 듣고 마음이 이상했습니다.

우리는 가끔 만신전에 오른 신에 대한 사망 소식을 듣습니다. 

영원히 불멸할 것 같은 신의 사망!

그것은 인간의 세치 혀에 오르내리기에는 불경한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영화 보기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던 어린 시절.

FM 라디오에 흘러 나오는 영화 음악들은 이미 봤던 영화를 다시 떠올리고 보지 못한 영화를 꿈꾸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영화 음악의 개척자 알프렛 뉴먼, 시대극의 귀재 미클로스 로자, 헐리우드의 미스터 멜로디 헨리 만시니, 이탈리아 음악의 대부 니노 로타, 프랑스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프란시스 레이와 미셀 르그랑...

엔니오 모리코네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가 작곡한 많은 곡들이 영화 음악의 경전처럼 내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보다가 좌석에서 튕겨나올 만큼 충격을 받은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장면 분석으로 그에 대한 추모글을 대신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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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음악을 사용할 때는 불문율이 있다.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곡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그것이다.


음악이라는 것은 이상해서 듣다보면 종종 그 음악과 관련된 추억에 빠져들게 한다.

마이클 로사토-베넷의 흥미로운 다큐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2014)는 치매 환자에게 예전에 듣던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기억을 잃어 가던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는 이야기다.

이 다큐를 보면 음악이 인간의 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확실히 깨닫게 된다(음악과 뇌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올리버 색스의 역저 <뮤지코필리아> 같은 책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음악. 특히 대중적인 곡들은 듣는 사람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영화에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반대로 이것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추억 팔이가 영화의 핵심이 되는 경우다.


1980년대 헐리우드는 영화를 마치 주크박스처럼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영화가 <더티 댄싱>이다.

영화에 흐르는 1960년대의 히트송들은 로맨스 장르인 이 영화를 한번쯤 꿈꾸었던 낙원으로 인도를 한다.

국내 TV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시청자를 추억 여행으로 이끄는 것은 그 시절 유행하던 유행가들이다.

꿀같은 개인적 추억에 젖게 하는 작품이라면 몰라도 대중적 히트송을 보통 영화에서 사용하는 것은 위험 천만의 일이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는 대중적인 노래를 영화에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그 규칙을 역이용한 작품이다.

레오네와 모리코네가 이 영화에 음악을 어떤 의도로 사용했는지를 알고 싶어서 안토니오 몬다의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대화>(2014)와 크리스토퍼 프레이링의 <Sergio Leone - Something to do with death>(2000)를 뒤져봤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뒤에 소개된 프레이링의 책은 500페이지가 넘는 영어책인데 세르지오 레오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일본어로도 번역되었는데 일본어 번역도 상당히 좋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영화를 만들기 전에 영화 속 배경인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음악들을 골라두었다고 한다.

'아마폴라', '갓 블레스 아메리카', '나이트 앤 데이', '써머타임' 그리고 비틀즈의 '에스터데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자 그럼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점은 전 세계적인 히트곡 '예스터데이'를 레오네와 모리코네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냐는 점이다.

동영상을 통해서 한번 확인해보자.


누들스(로버트 드니로)가 조직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느끼자 버스 정류장으로 도망을 친다.

누들스는 역무원에게 따로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가장 빨리 출발하는 버스 중에서 편도표 한장'을 요구한다.

이제 이곳 뉴욕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마음인 것이다.

여기까지 장면들은 누들스와 역무원 사이의 쇼트, 리버스 쇼트로 평범하게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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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무원으로부터 표를 받고 난 누들스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무르는데 이 때 흐르는 곡이 엔니오 모리코네의 오리지널 곡인 cockeye's song이다.

알다시피 cockeye는 사팔뜨기라는 뜻이지만 이 영화에서 윌리엄 포사이스가 연기하는 인물의 별명도 된다.

처음에는 불길한 저음으로 시작하다가 게오르그 잠피르가 연주하는 팬플룻 소리가 우울하게 흐른다.


이 음악이 왜 이때 흐를까? cockeye, 사팔뜨기라는 말은 누들스에게도 해당한다.

그는 삶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히 설명은 하지 못하지만 그의 인생은 어긋남과 배신의 연속이다.


누들스가 바라보는 곳은 '코니 아일랜드로 오세요'라고 적힌 벽화다.

그는 이곳을 이제 떠날 것이다.

역 한구석의 매점에서 먹을 것을 사들고 '오세요'라고 적힌 그곳에 누들스가 서 있는 것이 이 씬의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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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장면은 흐릿한 창살처럼 보이는 곳에서 시작되는데 창살에 늙은 누들스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이 쇼트는 감옥에 갇힌 누들스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는데 카메라가 뒤로 빠지자 창살이 아니라 거울임이 밝혀진다.

누들스는 오랜 세월을 시간의 감옥에 갇혀있었다.


30년을 뛰어넘는 점프 컷이 이루어지는 이 장면에서 레오네와 모리코네는 절대 해서는 안될 짓을 한다.


비틀즈의 명곡 '예스터데이'를 가사까지 넣어서 흐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두 대가가 변칙적인 수법을 사용한다.

가사까지 포함한 노래가 흐르게 하되 두 단어만 사용해서 '예스터데이'를 낯설게 만들어 버리는 신의 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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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다시피 비틀즈의 원곡의 가사는 이렇다.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Now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Oh, I believe in yesterday.

Suddenly, I'm not half the man I used to be,
There's a shadow hanging over me.
Oh, yesterday came suddenly.  


그런데 여기서 'Yesterday', 'Suddenly'만 따와서 지난 과거(Yesterday)에서 현재로 갑자기(Suddenly) 시간의 점프를 '음악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월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코니 아일랜드 안내 벽화도 뉴욕을 상징하는 빅애플의 벽화로 바뀌었으며 늙은 역무원 대신 젊은 안내원이 역사를 지키고 있다.

누들스가 차를 렌트하기 위해 사인을 하는 순간에 벽에는 오래된 뉴욕의 사진이 붙어 있다.

카메라가 사진을 향해 다가서자 누들스가 빌린 렌트카가 디졸브 되면서 나타난다.

오래된 뉴욕과 현재의 뉴욕이 다시 한번 겹쳐지는 순간이다.


비틀즈의 '예스트데이'를 두 단어만 사용해서 영화적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레오네와 모리코네 둘 중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음악의 창조적 활용이 이 영화를 더 위대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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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Comments
8 절믄오빠  
좋은 글이네요  다섯번도 넘게 봤는데  ㅋㅋ  그런재밌는일이 있군요
글을 길게 썼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 좀 뻘줌했는데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지울까 말까 고민했네요. ㅎ
20 큰바구  
무심결에 넘겨봤을 영화의 한 장면을 아주 심도 깊게 관찰하셔서 보시네요
영화를 잘 감상해 봐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글이 길어서 재미가 떨어질텐데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34 금옥  
한 10번은 읽은거 같네요,,, 볼때마다 스스로 새로운걸 깨닫게 됩니다. ^^~
(_ _)
14 Harrum  
말을 안 하고, 못 하는 까닭은...
(모르니까 입 다물자)
(기억이  안 나는데 이 대하물을 또 봐야 해...흑흑)

그 노래가 나오는 줄도 모르고 봤어요. ㅎㅎ
이 영화가 길긴 길죠. 한번 보려면 맘 단단히 먹고 봐야할 분량입니다. ㅎ
14 Harrum  
유투브 영상을 보니 기억나지 않네요.
그리고 아련해집니다.
남들은 감독판으로 볼 때 전 왕창 잘린 극장판으로 봤어요 ㅜㅜ.
그 다음 영화음악을 사러갔죠.
다시 좋은 글 올려주시니 고맙습니다~
13 소서러  
왕창 잘린 극장판이요?^^ 229분 판본? 그거로 보셨다면 잘 보신 거예요.^^
아니면 혹시 180분짜리 판본?..ㅠㅠ^^ 105분 판본은 절대로 아니길 빕니다..ㅠㅠ^^
14 Harrum  
친구집에서 비디오 테잎으로 봤으니까... (21세기 초에 ㅋㅋ)
아마도 180분도 안 됐겠죠.
13 소서러  
노래 속 과거, 연인에 대한 애잔한 앙금, 그 집착이
인생 통째로 넓혀지니 더욱이 기분이 묘한.. 슬퍼지는 멜로디입니다.
돌아보니 이제 남은 노년의 레전드 음악가들은
랄로 쉬프린, 존 윌리엄스, 조르조 모로더 옹 정도가 떠오릅니다.
어느 분이 이렇게 회상해주시더군요. 당시 이 영화의 국내 포스터 캐치 카피가
"그 지독한 센티멘탈리즘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라고요..^^

오늘날 감독 확장판으로 불려지는 소위 250분짜리 버전은 구성 면에서 참 엉망인데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마치 정본으로 불려지는 게 참 한탄스럽습니다.
주변에 컴플레인도 거의 없다시피해서 더 씁쓸한...
229분 버전과 250분 버전을 다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정확히 어떻게 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미국 극장용 버전인 129버전 보다는 쾐찮았던 것 같네요.
세르지오 레오네에 대한 저의 입장은 한 때 엄청 싫어했다가 다시 좋아지는 과정입니다. ^^
42 CiNePhIlE  
음악이 추억을 반영한다는 건 사실인것 같아요.
저도 어릴때의 추억에 빠질때면, 그 당시에 제가 좋아했던 음악들을 찾아듣곤 하니까요.
리뷰 잘 봤습니다.
'예스터데이'의 일화는 처음 알았네요.
누구의 생각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두분 다 천재인건 확실하지요^^
왠지 음악방에 같이 올리셔도 잘 어울릴듯합니다.
워낙 오래전에 본 영화라 이미지와 ost가 편집된 채 띄엄띄엄 기억이 나서 좀 아쉽네요.
언제 한번 시간내서 제대로 감상해야겠습니다.
근데 오리지널 완성판의 상영시간은 6시간이라고 알고 있는데, 혹시 맞나요?
제가 예전에 감상한건 4시간 좀 안되는 판본이었던것 같습니다.
6시간 버전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제가 본 거는 129분, 229분, 250분 세 가지 버전입니다.
1 fpdls0322  
좋은 글 감사합ㄴ다
읽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_ _)
8 Minor  
어떤 분야든 기존의 틀에 짜여진 정석대로 밟아 올라가기도 바쁜데
얼마나 많은 내공이 있으면 형식을 뒤엎는 시도를 할 수 있는지 경이로울 때가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