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 베스트 10
1. Barton Fink, 1991
핑크/찰리 내면의 거울. 단꿈에서 악몽으로, 미몽으로. 깨어나지 않는, 깨어나기 싫은.
2. Inside Llewyn Davis, 2013
창백한 밤을 순환하는 존재의 축축한 쓸쓸한 트립, 딜런은 오지 않는다.
3. The Man Who Wasn`t There, 2001
담배연기 속 멜랑꼴리한 내면의 독백, UFO로 미끌어지는 미스테리, 냉전의 한 시절.
4. Blood Simple, 1984
건조하고 비틀린 편집증(들)의 풍경, 텍사스. 진실은 텅 빈 수채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5. O Brother, Where Art Thou?, 2000
익살스런 체인갱들의 포크/블루스 트립. 현자는 아직 살아있고, 구원도 아직은 꿈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
6. No Country for Old Men, 2007
21세기, 안톤쉬거의 신랄한 신자유주의 정신질환 유머, 그러나 아무도 웃을 수 없다.
7. Raising Arizona, 1987
80년대, 신자유주의 도둑질이 만개하다. 그러나 하기스 기저귀는 비싸다.
8. The Big Leboski, 1998
베트남 트라우마를 넘어 볼링장 환각체험으로. 그러나 90년대가 왔어도 여전히, 더욱, 유골함은 비싸다.
9. A Serious Man, 2009
랍비의 공허한 횡설수설과 래리의 사소한 지리멸렬, 그러나 종말은 누구에게도 거대하고 공평무사하다.
10. Burn After Reading, 2008
허구와 협잡의 산물인 정보(감시) 사회, 이를 똑같은 방법으로 폭로하는 이 바보들은 얼마나 건강한가.
말씀하신것처럼, 문제는 코엔 영화들이 재미보장은 기본이고+ 작품의 질도 고르게 높아
뭘 넣든 괜찮은 리스트고, 뭘 빼면 좀 아쉬운 리스트가 되는거 같습니다.
최근작인 <카우보이의 노래>를 넣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요.
<밀러스 크로싱> 역시 초기 코엔영화 중에 상당한 수작이지만,
저는 주인공이 이중배신을 기껏 해놓고, 결국 원래 두목을 보호하려했다는 그 멘탈리티가
제 취향에 어긋나서 제외했네요 >,< 모름지기 느와르, 갱스터 장르의 주인공은
이러면 안된다고 생각하거든요(장르팬까지 삼중배신) ㅎㅎ
그래서 이영화 다시볼때 저는, 영화의 결말을 내 맘대로 바꿔서 본답니다~~ㅋ
암튼 말씀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도 게시판에 새글로 자신의 '코엔 영화 베스트 10'을
작성해서 여러 회원님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네요~~
<밀러스 크로싱>은 숲 속 장례식 결말대신, 버니를 죽인 가브리엘 번을 버나가 죽인다는 결말로 바꾼다면 제 리스트의 5위로 올렸놓을거고요.ㅎㅎ
찬밥 대우받는 <허드서커대리인>도 사실 정말 재미하나는 끝내주죠. 초기 코엔의 화려한 영화적 기교도 덤이고요.
<시리어스 맨>의 플롯은, 오해와 딜레마로 치밀하게 주조해낸 불행의 완벽한 '미궁'이라 불릴수있을거 같습니다.
코엔식 이야기구조(주인공을 불행에 빠뜨리기)의 최정점 같아요.
(쓰다보니 제 순위가 자꾸 바뀝니다ㅎㅎ)
스눞님의 1위는, <파고>라고 예상되는데.... 시간내서 함 뽑아주세요~ 보고싶어요~~^^
제 마음 속 1순위도 <바톤 핑크>입니닷.
ㅋㅋㅋㅋㅋㅋ
이유는 리시츠키 님이랑 똑같아요.
저 위 댓글에 적어 놓으신 것처럼, 보면 볼 수록 <바톤 핑크>는 단단하게 뭉치며 빛이 나고
<파고>는 조금씩 허물어져 풀어져 버리더라고요.
모든 것을 치밀하게 아귀 맞춤해 놓은 파고는 볼 수록 신선도가 떨어지는 데 반해(아마 기생충도 그러지 않을까요?)
바톤 핑크는 볼 수록 그 불가사의함에 매료되고 있습니다.
관객이 개입해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한 것도 몹시 매력적이고요.
<바톤 핑크>를 볼 때마다 무릇 고전의 지위는 시간에 의해 그렇게 획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 장면에서 느껴지는 광기 어린 미학적 성취도 그렇고요.
<바톤 핑크>를 볼 때마다 (전혀 상관 없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도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자꾸 떠오릅니다, 저는. ㅎ
(댓글 쓰다 보니 너무 재밌네요, 이런 대화. ㅋ)
글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풀어서 해주시다니 매우매우 공감합니다.
말씀처럼, 영화 처음 봤을때의 경탄과 질문을 반복관람을 통해서도 견딜수있느냐가 좋은영화의 관건인거 같습니다.
저에게 봉감독의 최고작(혹은 최애작)은 <플란다스의 개>이고, <기생충>도 좋아하는 작품이고 두번째 관람을 하고 싶지만은,
장삼이사들과 언론들의 지나친 성찬들 때문에 벌써부터 괜히 지친감이 있네요.
덧붙여 제게는 <파고>의 결말에서,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범인을 찾으려 순찰하다가,
숲속 은신처를 "그냥" 발견하고 그를 죽이고 사건을 "그냥" 해결한다는것에는 심히 의아했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숨막히는 서스펜스나 반전에 반전, 복잡한 두뇌게임을 목표로하는 영화가 아니라는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이 결말은 개연성이 많이 부족해보입니다.
결말이 이러하니, 에필로그에서의 프란시스 맥도만드 부부가 침대에서 티비를 보며 부부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은 그래서 앙상하게 보일뿐이고요.
어떤 의도로 삽입했는지는 알겠는데, 그냥 기능적 의미로만 작동하는 에필로그씬을 위한 에필로그씬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영화는 느슨한 연출과 빛나는 캐릭터들, 범죄의 풍경이랄수있는 롱샷의 미네아폴리스 설경의 모습 등은 코엔 영화의 또다른 경지라 생각하지만요.
<허드서커 대리인>은 하도오래전에봐서 저에겐 아직 영화적 재미로만 남아있고,
<시리어스맨>과 더불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언젠가 스눞님과 길게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노인>은 저에게, 메인플롯의 해결이랄 수 있는 안토쉬거와 모스의 클라이막스에서,
모스의 죽음을 생략하고 토미리존슨의 시선으로 마치 티비뉴스 중계화면처럼 결과만 보여준 감독의 의도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있네요.
이후 이어붙인 20분이나되는 긴 에필로그 씬들인, 안톤쉬거가 모스 아내를 죽이는 장면과 교통사고 장면은 적절했지만,
토미리존슨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노인과의 대화와 자기 아내와의 대화는 좀 대단히 중언부언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가 나쁘다는게 아니라, 저역시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인데 이런저런 질문들이 많이 떠오르게하네요.
여러 공감가는 재미난 의견 잘읽었습니다. 즐건 주말되세요~~!! ^^
너무너무 재밌습니다. ㅎ
리시츠키 님 글 읽다가 오래 전 블로그에 끄적거려 둔 글이 생각 나서 들여다 보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ㅋ
몹시 부끄러운 잡소리지만 이런 부끄러운 수준도 제 모습의 일부인지라 아무튼 심심하실 때 한 번 읽어 보시라고 링크를... ^_^
https://blog.naver.com/nicemonk/90084335437
정말 언젠가 맘 잡고 컴 앞에 앉아 씨네스트 영화 애호가님들과
영화 수다를 실컷 나누면 흥미진진할 것 같습니다. ㅎ
긴글 재미나게 읽고나니, 영화를 조금은 다른방향에서 볼수있지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제가 영화보며 느꼈던점을 대충 몇 자 뚜드려봤습니다. 덕분에 영화를 본 감상을 정리할수있게 되었네요. ㅋ
<노인>에서 그려진 세계, 그리고 안톤쉬거가 악으로서, 자의적이고 우연적이라는데는 달리 해석할수도 있을거같습니다.
그 시스템, 세계와 안톤쉬거는, 규칙적일뿐아니라 필연성으로서의 악을 은유한다고 볼수도 있을거같습니다.
더불어 안톤쉬거는 감정도 있어, 짜증도 내고 농담도 할 줄 알고요. 물론 우리는 웃을수없지만요.
이를테면, 에필로그에서 안톤쉬거와 모스 아내의 대화: 그녀가 "이럴필요가 없자나요"고 하자,
안톤은 웃으며 "사람들은 늘 똑같이말해. 이럴필요 없잖아요" 등 영화 내내 안톤은 그와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다양한 표정과 그만의 정신병적 유며를 보여줍니다.
어쨌든, 제가 세계와 안톤쉬거라는 악의 존재가 규칙적이고 필연적이라 보는 이유는,
그가 21세기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으로서 거의 초인에 가까운 인간의 모습의 현현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고전 서부극에서는 어린 주인공의 가족(구체적으로 아빠)가, 은행의 협잡에 속아 집이나 농지를 빼앗기게되고
성장한 주인공이 악당들과의 분투를 통해 결국 복수에 성공하고 영화의 막이 내립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필로그에서의 토미리존스와 노인과의 대화나 아내와의 대화가 가리키듯,
"노인"이 상징하는 그런 주인공 혹은 보안관(들)의 도덕률이나 정의감으로서 지킨 나라(공동체)는,
이제 코엔의 21세기 서부극에 와서, 결말은 비틀어지고 복수는 불가능해집니다.
악당이 승리한다는, 클라우스 킨스키의 <The Great Silence (68)>와의 비교도 재밌을거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서부극의 주인공/악당의 대립의 기저에는 돈(달러)이 있고, 심층에는 "은행"이 전제되어있다고 봤을때,
<노인>의 에필로그에서 안톤이 끝내 모스 아내를 죽인다는 설정은,
결국 21세기 금융자본이 모스가족의 집을 빼앗는다는 이야기일것입니다.
고전이나 현대서부극이나 은행이 주인공의 집을 빼앗아 불행하게 만든다는것은 동일하되,
<노인>에서는 영화를 진행시키면서 주인공과 악당을 전복시키고, 서부극의 구조 자체를 되집어 버리는 것이죠
코엔감독이 영화를 만든 시점인 2007년의 미국의 상황을 감안했을때,
영화 처음에 모스가 돈가방을 주운다는 것은 모기지론으로 집을 구입했다는 것이고,
관객은 클라이막스까지 그를 따라 함께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리고는 스눞님이 정확히 지적하셨듯이, 클라이막스까지 따라간 관객의 모스에 대한 동일시는
난데없이 느닷없이 일거에 무너지게 됩니다. 모스의 죽음이 생략되고
마치 제3자인 티비뉴스의 중계화면 같은 잔인한 현실의 객관화는 그 누구도 예상을 못했을것입니다.
더구나 영화가 관객에게 더욱 잔인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바로 이 이후의 전개에서일 것입니다.
관객이 모스에 이입한 감정과 긴장감은 소격효과를 통해 무참하게 폐기되고,
이제 관객은 원하든 원치않든 안톤쉬거를 따라 잔혹한 동행을 함께하는 것이죠.
그 동행이란, 안톤이 아내를 살해한다는것, 즉 모스의 집을 빼앗는 죽음의 채권추심의 과정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이죠.
에필로그에서 안톤이 아내를 죽이기전에 "동전도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여기 온거야"라고 말하는것은,
감독이 관객에게 이르길, 영화의 주인공은 모스대신 이제 악의 화신 안톤으로 바뀌었고,
당신들(관객)의 운명은 불과 동전의 운명일 뿐이라는 것을 직시하라.
그리고 여기까지 쫓아온 당신에게, 주인공이 승리하는 해피엔딩이나 정의따위는 없을테니,
절대적인 무력감과 절망을 뼈져리게 체험하라, 라고요.
안톤이 금융자본의 화신이란것은 영화 후반부, 그가 고층빌딩(월가?)의 사무실에 올라가
사장을 살해하는 장면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거 같습니다. 이는 안톤이 금융시장 최정점의 꼭대기라는 것의 천명일것입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살인을 외치다, 랄까요.
그리고 그 옆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돈세탁을 위한 회계사가 있습니다. 안톤이 묻길 "내가 보이나?"
질문이자 질문 아닌 이 질문은, 법 위에, 국가 위에, 보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금융자본으로서의 세상의 지배자인 안톤쉬거를 승인하는 절차이자 선언일 것입니다.
이로써, 모스의 불행(죽음)이 더높은 수익률을 보장하는 금융투기와 부동산거품의 21세기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채무자 모스는 따라서 규범적으로 규칙적으로 법규적으로서 필연적으로 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에필로그 끝에서, 그 전능한 안톤이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이 역시 금융자본주의 시장의 필연성과 관련있어보입니다.
전능한 폭력 기계로서의 자본주의도 30년주기로 고장나듯 그의 사고 역시 필연인 것이죠.
이유는 모스(공동체, 개인 등)을 죽인 댓가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코엔감독이 미리 예견하듯,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천문학적 구제금융으로 성급하고 미봉적으로 봉합했듯이,
안톤은 순진한 아이들에게 큰 돈을 쥐어주며 다시 생명을 끈질기게 유지합니다.
결국, 21세기, 안톤쉬거의 신랄한 신자유주의 정신질환 유머로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 전제로서의 과거 한탄조의 <노인을 위한 나라가 있었다>라는 고전 서부극 장르를,
거꾸로 물구나무 세운 현재 진행형의 <안톤 쉬거를 위한 나라만 있다>가 되는셈인데,
이는 우리사는 세상의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잔혹함, 어떤 불가능성을 은유하는것처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