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하게 읽기(5-1) - 영화 속의 소도구는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이야기

<블러드 심플.> 꼼꼼하게 읽기(5-1) - 영화 속의 소도구는 무엇을 말하는가?

15 하스미시계있고 6 1401 0

​이번 편으로 끝낼려고 했는데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글이 길어지니 한번에 다 안 올라가서  '천정용 선풍기' 부분은 2회로 나누어 올립니다.

보잘 것 없는 글이지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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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천정용 선풍기(ceiling fan)


코엔 형제의 영화에 공공연한 사실 하나.

그들의 영화에는 둥근 회전 물체가 어김없이 등장하며 카메라는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

 

이를테면 <밀러스 크로싱>(1990)의 숲속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모자, <위대한 레보스키>(1998)에서 거리에 날아다니는 회전초와 레일을 따라 구르는 볼링공,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2000)에서의 원형 포머드 캔,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2001)에서 밤하늘의 UFO와 자동차 사고 후 굴러가는 타이어 휠... 그리고 이제 소개할 <블러드 심플>의 천정용 선풍기.

 

원형의 소도구는 코엔 형제의 원형 구조 플롯이라는 것과도 묘하게 겹친다. 예컨대 한 뮤지션의 율리시스적 귀환과 같았던 <인사이드 르윈>(2013)이나 <블러드 심플>의 돌고 돌아 원래 소유자에게 돌아오는 권총의 행방을 떠올릴 수 있겠다.

 

원형의 소도구와 플롯은 등장인물을 지배하는 숙명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일 것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의 인물이 프로타고니스트(주동 인물)는 운명적 힘에 굴복하고 안타고니스트(반동 인물)는 그 운명의 힘을 환기하기 위해 등장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천정용 선풍기는 영화의 무대가 되는 텍사스 지역의 뜨거운 기온을 가늠하기에 적합한 소도구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선풍기를 영화에서 처음 의식하게 되는 장면은 다음과 같은 시퀀스에서이다.


집을 나온 애비는 레이의 집에서 같이 지내지만 레이는 애비의 행실을 의심하고

결국 애비는 거실에서, 레이는 침실에서 자게 된다.

 


장면이 바뀌면 마티의 어두운 사무실에 회전하는 선풍기를 로우 앵글로 보여준다.

이어서 우울한 표정을 천장을 쳐다보는 마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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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천장용 선풍기가 보이는데 그것을 쳐다보는 어둠 속의 애비(이 공간은 레이의 집이다. 즉 선풍기를 통해 공간을 점프한 것).

 

레이의 방에 불이 꺼지자 애비가 일어나고 방에 있는 레이도 잠을 못 이루고 있다.

다시 레이의 방 천장에 비친 그림자를 보여주다가 사무실에 있는 마티 쪽으로 카메라는 넘어온다.

이윽고 카메라는 복도를 걸어 레이에게 다가가는 애비를 보여주고 잠에서 깬 레이가 애비를 어루만지면서 이 시퀀스는 끝난다.

 

마티, 애비, 레이가 있는 세 공간을 두 개의 천장용 선풍기를 이용해서 평행편집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연출의 재치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때 선풍기는 마치 연 실을 감는 얼레처럼 세 개의 공간을 감아주는 축으로 기능을 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세 인물의 감정을 동시에 파악하게끔 한다.

여기서 선풍기는 감독의 능력을 과시하는 역할을 한다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는 선풍기 활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일반 선풍기가 아니라 천정용 선풍기에 대해 영화 감독들은 더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프랜시스 코폴라는 <지옥의 묵시록>(79)에서 호텔의 선풍기 소리와 헬리콥터 소리를 겹쳐지게 사용해서 후방에 있지만 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병사의 심리를 묘사했다.


<돼지와 군함>(61)에서 이마무라 쇼헤이는 여주인공이 미군에게 윤간을 당할 때 천정용 선풍기를 사용함으로써 술에 취한 여성의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를 묘사하는 동시에 불필요한 섹스씬을 가리는 이중의 효과를 성취해낸다.


선풍기는 아니지만 <워 호스>(2011)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풍차를 이용해서 비슷한 효과를 낸다. 탈영을 한 형제가 잡혀 총살당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끔찍한 묘사를 자제하고 형제가 총에 맞는 순간에 풍차의 날개가 지나가면서 화면을 가린다. 형제의 죽음을 장엄하고 시적인 분위기로 만들어 내는 데 풍차가 사용된 것이다.

 

천정용 선풍기의 위치에 놓인 카메라의 하이 앵글 샷은 종종 인물의 운명을 지배하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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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심플>에서 카메라는 선풍기의 위치에서 총에 맞은 마티를 한참이나 응시한다.

이때 카메라는 절대자/신의 입장에 놓여있다.

잠시 후 선풍기가 천천히 돌면서 마티의 모습을 지워버리며 장면 전환이 될 때 마티의 죽음을 시각적으로 선고하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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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16 o지온o  
잘 읽었습니다. ㅋㅋㅋㅋ
감사합니다^^
20 큰바구  
재밌군요 참으로 여러각도로 연출씬을 해석해 주시네요
마치 감독이 되신듯 합니다 ㅎㅎㅎ
과찬이십니다.
20 암수  
천장용 선풍기에 대한 해석이 흥미로우면서도 탁월하네요...
지옥의 묵시록 장면도 떠오르고........그러고 보니 영화속에서 천장선풍기가 윙윙 돌아가고 그 밑에 있는 배우는 혼란의 정신상태에 휩싸이고
요런 장면들이 부지불식간에 많이 있었던 듯 하네요....
예전에 저런 장면들 나오면 막 메모를 해뒀는데...
이젠 기억력이 많이 나빠졌는데도 그냥 기억에만 의존하다보니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