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하게 읽기(1) - 영화 속의 소도구는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이야기

<블러드 심플.> 꼼꼼하게 읽기(1) - 영화 속의 소도구는 무엇을 말하는가?

12 하스미시계있고 13 567 2 0

최근에 <블러드 심플>(1984)을 봤다.

이미 비디오테이프, DVD, 블루레이로도 봤지만 '스크린'으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큰 화면으로 보니 뭔가 제대로 봤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코엔 형제의 데뷔작인 이 영화에 대한 글은 구글링을 조금만 해봐도 차고 넘친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 열광적으로 쓴 글 중에 정작 얻을게 별로 없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고 흥분했다는 감상은 있지만 시네마틱한 체험을 일으킨 요인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침묵한다.

심지어 영화의 줄거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글도 수두룩하다.

비단 이 문제가 관람자에게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998년에 리마스트링 된 이번 버전을 보다가 깜짝 놀랄만한 자막을 봤다.

영화 초반에 사립 탐정 비셔(M. 에밋 윌쉬)가 술집 사장 줄리안 마티(단 헤다야)를 만나는 장면에서 은도금 라이터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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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 중앙에는 "Loren"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로 로프 장식이 있다. 라이터 측면에는 "Elks Man of the Year"라는 글자도 보인다.

영화관에서 이 부분에 내가 본 자막은 연인이었는데 번역가가 필기체로 새긴 "Loren"“Lover”로 잘못 본 것일 거다.

라이터는 <블러드 심플>에서 결정적인 소도구인데 "Loren"“Lover”로 오독을 해놓으니 영화를 본 사람 중에 부정한 연인을 올가미로 잡으려는 것을 의미한다는 둥, 썩은 생선 밑에 놓인 라이터를 보고 사랑이 부패라는 것을 상징한다는 둥 별별 희한한 해석이 쏟아진다.

 

사실 사립탐정의 이름 "Loren Visser"는 영화 속에서 한 번도 불리지 않는다. 영화 스크립터에만 나오는 이름인데 번역자가 대본을 조금이라도 챙겨봤다면 이런 실수는 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영화를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거나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보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

이 생각은 <블러드 심플>의 주제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알다시피, 영화 제목 “blood simple”은 대실 해밋의 하드보일드 소설 <붉은 수확>에서 따온 것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고 나면 그의 머리는 물렁해진다. 블러드 심플이라고 해밋은 쓰고 있다.

조엘 코엔은 <타임 아웃>과의 인터뷰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심리 상태를 묘사한 것인데 simple은 속어로 crazy라는 의미가 있다”. 즉 살인 후 혼란과 두려움으로 미쳐버리기 직전의 범인의 상태를 말하는 제목이다. 영화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살인 후 머리가 단순해지다 보니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되어 바보 같은 상황에 빠진다.

영화는 눈앞에 놓인 증거들을 못 보거나 재조합 후 해석에 실패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bloodblind를 대체하고 싶을 만큼 영화 속 인물들은 눈이 먼 상태다.

맹목적인 상황에 빠진 인물을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영화 속의 대사가 있다.

비셔가 마티를 살해하고 마티의 사무실에서 빠져나가면서 하는 말.

“Who looks stupid now.(이제 누가 바본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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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는 그 말을 내뱉은 비셔라는 것을 카메라는 증명한다. 어떻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라이터를 살인 현장의 물고기 밑에 놓아두었으니까.

그 상황을 못 본 눈 뜬 장님 비셔.

 

동일한 영화를 거듭 본다는 것은 이제까지 못 봤던 것들을 다시 깨닫는 과정이다. 오랜 시간 동안 <블러드 심플>을 보면서 내가 미쳐 못 봤던 것들을 이번 기회에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부분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다.

 

이왕이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살인 현장의 증거품을 가지고 상황을 재구성하듯이 나는 소도구를 중심으로 이 영화를 재구성하고 싶다.

즉 라이터, 알약, 선풍기, 전화기, 핑거 스프린터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머리가 물렁해졌다. 본격적인 글은 다시 올리겠다. 블러드 심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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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Comments
13 o지온o  
Loren 을 Lover 로 잘못 본 것이라면 정말 절망적인 상황인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어 초짜인 제가 봐도 「로렌」이며 「러버」로 보기 위해서는 Lover 의 e 가 없게 되는 상황이 되는데요.
글자 새겨져 있는데 제대로 좀 봤으면 됐을 것을.. ㅋㅋ

어쨌건, 이 영화를 보지는 않았는데 시간 되면 한 번 봐야겠군요.
꼭 보세요. 정말 잘 만들었거던요^^
S 에릭카트먼  
코엔 형제의 의도에 걸맞는 번역가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고 좀 심했네요 저건^^
'참을 수 없는 사랑' 정도만 제외하면 코엔 형제의 작품은 전부 다 좋아하는 편인데 이 작품 역시 발군이지요~
이어지는 글도 기대됩니다!!
에릭님이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괜히 거창하게 시작하다가 실망만 드릴지도...
S umma55  
아, 진짜 너무했네요 ㅠㅠ
로렌을 러버로...

연재를 기다립니다~
씨네스트 고수님의 댓글은 언제나 즐거우면서도 부담감이 갑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으시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12 리시츠키  
아. 얼마전에 다시 개봉했죠!
근데, 이번에 극장에서 자막으로 "러버"라고 했나요???
흐흐, 정말 너무하는군요.

다른 영화도 아니고 코엔영화라면, 사물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장면이 전매특허인데,
차라리 이 장면에 자막을 그냥 넣지나말지, 이걸 이렇게 대충하면은.... 영화보고 머리가 정말 물렁해지겠는걸요?

분노의 저격들이 이어지겠습니다.

blood simple 제목에 담긴 뜻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사진과 글 재밌게 잘 보았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합니다 ^^
리시츠키님이 읽어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12 암수  
이런 영화적 접근법 너무 좋습니다.........어렵고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난해함보다는 소도구를 활용한 영화 설명.....
읽는 사람...머리에도 속속 박히고.......의외로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결정적 암시를 포착해내는 횡재를 하는 경우도 있구요...
암수님 같은 클래식 영화 애호가께서 읽어주셔서ㅈ감사합니다. 다만 제 글이 너무 길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두렵네요 ㅎ
12 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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