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 말하는 니콜 키드먼

영화이야기

박찬욱이 말하는 니콜 키드먼

M 再會 1 2472 1
2012.05.27.

니콜은 숙련된 연기 기술자이죠. 배우·스태프 통틀어 통역이 제 말을 옮기기도 전에 혼자서 알아들어버리는 일이 가장 잦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몰래 배운 게 아니냐는 말을 꽤 들었죠. 제가 무슨 대담한 제안을 내놓아도 당황하거나 곤란해 하는 법이 없어요. 니콜과 일하다 보면, 저의 가장 와일드한 상상도 그저 전에 몇 번이고 들어본 적 있는 시시한 상투형에 불과하다는 생각조차 들어 우울해지곤 합니다.



2012.10.04.

Q: 배우들 얘기를 하자면 역시 니콜 키드먼이 가장 궁금하다.

니콜 키드먼은 굉장히 열성적이다. 실제 촬영할 때 대역배우들이 서 있는 자리에 표시를 해두는데, 조명 세팅이 끝나면 대역이 빠지고 실제 배우가 거기 들어간다. 그럴 때마다 니콜은 호출하기 전부터 거기 와 있다. 그럴 때가 정말 자주 있었다. 그러면 아무래도 후배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또 그녀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테스트 촬영 때인데 그땐 보통 어떤 필름을 쓸까, 어떤 필터를 쓸까, 조명 컨셉은 어떻게 잡을까, 하면서 미술팀이나 의상팀까지 아울러 시각적 컨셉을 확인하는 단계다. 그러면 배우는 의상과 메이크업을 끝내고 카메라 앞에서 촬영감독이 '자, 정면이오, 옆면이오' 그러면 정면으로 몇초, 측면으로 몇초 그렇게 찍으면서 준비를 한다. 대개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주변 스탭들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때도, 니콜은 마치 카메라가 돌아가는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서 연기한다. 그래서 니콜이 테스트 촬영을 할 때 숙연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웃음) 그렇게 함께 작업하며 느낀 건, 그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예술영화를 만드는 아시아의 한 감독을 자기가 잘 대해주고 보호해주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 사람 같았다. (웃음) 그리고 할리우드에서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보통 리허설을 안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나는 영어도 서툴고 낯선 작업환경이라 오차도 있을 수 있고 현장에서 머뭇거리는 게 싫으니 미리 캐릭터 해석 등에 대해 토론하고 싶다. 굳이 리허설이라기보다는 서로 대화를 나누며 내가 왜 이렇게 대사를 썼고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고 하는 얘기들을 나누고, 또 배우의 얘기나 접근법에 대해서도 들어보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말한 그런 이유라면 좋다'며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나중에 그런 시간들이 정말 좋았다고 얘기해줬다. 여러모로 클래식한 대배우의 풍모를 느꼈다.



2013.01.07.

굳이 '쾌감'이라고 표현한다면, 역시 배우에 관한 부분이지 싶다. 난 원래 잘 긴장하지 않는 사람인데 니콜 키드먼과 처음 만나 얘기를 나누던 날, 문득 '아, 이 사람이 스탠리 큐브릭과 영화를 찍은 사람이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입이 바짝 마르더라. (웃음)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의 명배우가 내가 찍는 화면 안에 있다는 게 생소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2013.02.13.

배우는 연기를 잘 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니콜 키드먼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일 뿐, 한국배우와 똑같다. 언어나 인종, 국적을 떠나 똑같다.



2013.03.02.

할리우드 작업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좋은 배우들은 많지만 니콜 키드먼은 세계에 한 명 밖에 없지 않나. 솔직히 니콜 키드먼에 대해 도도하고 까다롭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그럴 만한 자격 있는 배우라 생각했다. 근데 실제로는 너무나 소탈하더라. 처음 만났을 때 '내 임무는 감독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나를 악기로 사용해달라'고 하더라. 감동 받았고 너무 편했다.

미국 사람들이 하도 히치콕 히치콕 얘기를 하니까 (니콜 키드먼이) '이 감독은 누군가 다른 선배 감독의 영향이나 참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 감독이다. 자기 세계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 얘기 그만 해라'라고 말하더라. 고맙기도 했고 내 마음이기도 했다.



2016.12.21.

<스토커> 첫 촬영날이었나, 니콜 키드먼이 잠자는 장면을 찍을 때 침대에 눈을 감고 누워서 몸을 마음대로 만지라고 하더라. 팔이나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여서 당신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라는 거였다. 이런 배려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남성감독이 여배우에게 신체적 접촉을 하는게 조심스러운 문화에서 비롯된 거잖나. 확실히 조심해야 하는 문제다.



2017.07.12.

이번에 칸에 가서 니콜 키드먼을 만나 한 편 더 하자고 했어요. 저는 온통 여성에 둘러싸여 있어요. 아내와 딸, 그리고 공동작가와 의상, 미술을 담당하는 동료들도 모두 여성이에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강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에 관심이 생겼고, '아가씨'(2016년)를 만들게 됐죠. 다음은 뭐가 될지 아직 모르겠어요.



2017.08.09.

Q: 특별전의 또 다른 상영작 <매혹당한 사람들>은 <스토커>에서 함께 작업한 니콜 키드먼이 출연한 작품이기도 하죠.

올해는 니콜 키드먼의 해죠.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 네 편이고, 그중 경쟁부문에 두 편의 영화가 올랐으니까요. <매혹당한 사람들>과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라는 작품에서 놀라운 연기를 선보였는데, 그녀가 두 번째 전성기를 지금 막 시작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칸에서 따로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했죠. 왜 시나리오를 안 주냐고 하더라고.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기만 했더니 저렇게 늘 웃기만 하고 대답을 회피한다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경쟁부문의 두 영화 모두 상당히 센 영화였는데도 앞으로 정말 '스트롱'한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언제나 배가 고픈가봐요. 대단들 해요. 이자벨 위페르 누님이나 니콜 키드먼이나.

Q: 올해는 칸국제영화제 70주년이 되는 해였죠.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예년보다 더 많은 영화인이 칸을 찾았는데, 특히 인상적인 만남이 있었나요.

데이비드 린치와 사진을 찍은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웃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베를린에 갔을 때 린치와 같은 호텔에 묵은 적이 있어요.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거든요. 이번에도 긴 얘기는 하지 못했지만, 나의 영웅 중 한명인 린치와 만났다는 데에서 감동을 느꼈어요. 제인 캠피온과의 만남도 참 좋았죠. 니콜(키드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최근 TV 작업에 재미를 느끼고 있더라고요. 한국에 오자마자 그녀가 연출한 <톱 오브 더 레이크>를 찾아봤어요. 니콜은 두 번째 시즌부터 나온다고 해요. 뉴질랜드의 <트윈 픽스> 같은 작품이랄까. 정말 재밌게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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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34 HAL12  
젊었을때보다 나이들어가면서 더 매력적인 배우가 되가는 느낌...